최근 태동한 새 생명 재단의 이사장 홍준식(72. 포레스트 힐) 박사는 알려진 바와 같이 전직이 의사이다.
그러나 그를 보면 단순한 의사라기보다는 인술을 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홍 박사는 환자들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많다. 66세에 은퇴하고 나서도 혹시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익힌 의술을 환자를 위해 쓸 수 있는 길을 없을까"하고 늘 주위를 살핀다.그래서 그는 결국 평생 동안 하고 싶던 커뮤니티 내의 절박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새 생명 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도 그를 79대로 보지 않는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젊어 보이는 것은 이처럼 남을 돕고 환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온 덕이다. 육체적 나이도 그렇지만 매사에 활기차고 적극성을 띠어 정신 연령도 젊은이 뺨칠 정도다.
그의 하루생활은 알고 보면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분주하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일주일 내내 점심, 저녁을 같이 하면서 만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거나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방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다. 전직이 의사라고는 하지만 의술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 친교하며 여러 방면에 대한 화제로 대화한다. 상대방과 좋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의료상식을 알려주는데도 적극적이다. 그것이 홍 박사의 일과이자 삶의 패턴이다.
한마디로 생애를 보람있고 알차게, 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절대로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스케줄을 짜 어떻게든 은퇴 후 생활을 값지고 보람있게 보내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한다. 은퇴한 후 그는 첫 번째로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기념재단 회장을 맡았다. 이어 1세와 2세가 협조해서 사회복지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1일 1달러 기금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는 코리언 아메리칸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의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한인사회에 꼭 필요한 새 생명 재단의 이사장직까지 떠안았다.
"난치병을 진단받고 쩔쩔매는 한인들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치유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재정지원을 해주면 그들이 다시 건강이 회복돼 새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홍 박사가 새 생명 재단을 맡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활동이 도움이 된다면 하는 생각으로 이 일을 선뜻 맡기로 한 것이다. 이런 일이 바로 그가 꼭 하
고 싶었던 일이고, 또 새 생명재단은 한인사회 내에 반드시 필요한 기구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홍 박사는 강조한다.
이것이 직업인으로서 가질만한 큰 관심거리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있으되 단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그의 관심은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를 어떻게 하면 고통이 적고 여생을 추하지 않게 잘 마칠 수 있는 가에 모아진다. 또는 나이 많아 중풍이나 뇌졸중 같이 회복하는데 힘이 드는 환자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지도 지대한 관심사다.
때문에 집안에 의사나 간호사 등 의논상대가 없어 답답하거나 겁이 나는 환자, 그의 가족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치유 방법을 알려주고 회복이 힘드는 경우는 평화스런 마음을 갖게 해주는 일을 하게돼 너무나 기쁘다고 한다. 홍 박사가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가 그만큼 병원에서 행정업무에도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정보도 많기 때문이다.
홍 박사는 한국에서 연세대학교 의대를 55년 졸업한 후 미국 센트루이스 디폴 허스피탈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마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원주 기독병원의 초대 산부인과 과장으로 1년 동안 근무하다 모교인 세브란스 병원의 산부인과 조교수로 1년 재직했다. 그때 미국에 있던 세스란스 재단의 병원행정 담당자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따라 미국으로 되돌아 왔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병원의료행정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세스란스 병원 부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나이 32세.
부원장 임기 2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와 피츠버그 대학교수의 도움으로 버진 아일랜드 병원에서 의료행정 보험국장 임기 2년을 마쳤다. 다시 한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 뉴욕으로 임시로 온 것이 뉴요커가 된 배경이다. 그때부터 베스 이스라엘 메디칼 센터에서 외래담당 부원장으로 5년 일하다 브루클린 킹스카운티 메디칼센터에서 외래담당 응급실 부원장으로, 74년부터는 가톨릭 메디칼 센터에서 극빈자를 위한 외래진료소 총 책임자로 재직한다.
그리고 나서 미국 미국 의료계가 지나친 전문화로 문제가 많은 점을 커버하기 위해 미국에서 처음 신설된 가정의학과의 레지던트 훈련을 위한 첫 디렉터로 취임했다. 또 가톨릭 메디칼 센터에서 병원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을 10년 동안 역임, 병원행정 경험을 톡톡히 쌓은 후 이 직책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은퇴했다.
이런 경험과 실력이 배경이 돼 은퇴후 필라델피아 한인사회에서 처음으로 서재필 재단의 회장직을 2년간 맡았다. 이 기간 기금모금, 건강상담소 신설, 노인직업 훈련소 개설, 도서관 학장으로서 많은 봉사실적을 남겼다. 그 때 신청했던 영어교육을 위한 서재필 학교가 이제 정부로부터 허가가 나와 갓 이민 온 한인학생들이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됐다.
홍 박사가 은퇴 후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낸 큰 결실인 것이다.
소아과 의사로 같은 해에 은퇴한 동갑내기 부인 민인숙(72) 여사도 홍 박사의 이런 뜻을 알아 그의 활동을 항상 말없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슬하에 변호사로 보스턴 매사추세츠 재판소의 수석 판사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홍미령(44)씨 가족과 캘리포니아 실리콘 벨리에서 외과의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들 홍원희(42)씨 가족이 있다.
그는 "은퇴하고 아이들도 다 출가하고 나니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남은 여생 건강한 몸으로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이웃을 돕는 마음으로 살면서 조금이나마 한인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한다. 항상 유쾌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건강의 비결인 것 같다는 홍 박사는 매주 2~3차례 골프를 한다. 스코어 보다는 운동 삼아 걷는 재미로 치고 있는데 이것도 적지 않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새 생명 재단을 운영하면서 그 일환으로 한인사회를 위한 건강상담실을 개설, 매주 시간을 내 한인들을 위한 무료건강 상담 봉사를 할 계획이라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가 뿌리는 씨앗이 언젠가는 한인사회의 밝은 희망의 불꽃이 되는 그런 알찬 열매로 거두어지길 기대해 본다.
<여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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