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피부, 금발머리, 푸른 눈이 부러웠다. 웃으면 찢어지는 내 눈이 싫었다. 학교에는 나 같이 생긴 학생이 없었다. 내 부모는 나를 ‘명예 백인’으로 잘 대우해 주었지만 백인 가족들에 둘러 쌓여 있는 나 자신을 거울로 볼 때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미네소타의 한 한인 입양인은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했다.
그의 가슴앓이는 이어진다. “캠퍼스에서 한국 대학원생이 서툰 영어로 한국말 할 줄 아느냐고 물어와 모른다고 답하자 그녀는 다시는 나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동화되기 어려웠다.”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다른 한인 입양인은 고등학교 교사들로부터 당한 수모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하루는 프랑스어 선생이 한국말 몇 마디를 해보라고 요청했다. ‘모른다’고 하자 ‘한심하다’며 내가 한국인이므로 당연히 한국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죽고 싶었다. 알약, 자해, 과속운전 등 갖은 방법을 떠올렸지만 결행하지 못했다.” 그는 숱한 아픈 기억들을 뒤로하고 조만간 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을 배우고 돌아 올 계획이다.
이젠 어머니가 된 또 다른 한인 입양인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왜 입양됐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으나 양부모가 소상히 말해 주지 않았고 그들을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 ‘뿌리’에 대해서 캐묻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생후 14개월 때 대구시청 앞에 버려졌다. 양부모 밑에서 성장해 생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나갔지만 헛수고였다. 그래도 한국을 배우고 한국인이란 자부심을 듬뿍 느끼고 왔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먹은 비빔밥 같은 게 입양아들의 인생이다. 비빔밥은 재료들을 따로 먹으면 맛이 없지만 잘 섞어 먹으면 괜찮다”며 입양아 출신이라고 기죽을 이유는 없다고 했다. 한인 입양인들은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입양한인커넥션’에서 이렇듯 애틋한 사연을 나누고 있다.
가족과 함께 이민 와 살아도 어릴 적엔 문화충격으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기 십상이다. 하물며 백인가정에서 자신이 백인인 줄만 알고 지내다가 점차 커가면서 겪게 되는 입양인들의 고뇌는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미네소타에서 백인 3명을 살해하고 도주하다 라스베가스에서 자살해 전국의 주목을 끌었던 사람이 한인 입양인으로 밝혀지면서 이들에 대한 얘기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범죄를 두둔할 수는 없지만 입양인들이 얼마나 힘든 ‘여로’를 걷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이들이 살면서 받게 될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닐까. 입양인들과의 교류를 활성화 해 이들의 아픔을 나누었으면 한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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