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말부터 피기 시작한 무궁화 10여 그루가 7월이 되자 제철을 만난 듯이 앞 뒤 울타리에 한창이다. 토종 묘목을 심은 지 20여년만에 이젠 두길 남짓하게 자랐다. 연 분홍색이 주종을 이루지만 사이사이에 흰색, 진홍색이 끼여드니 보기에도 좋다.
하와이 무궁화도 ‘나도 한몫’ 하고 끼어들었는데 토종 무궁화와는 달리 한 세기 동안의 풍상 때문인지 꽃잎은 그런대로 실한데 잎사귀가 다소 거칠고 단순하며 키가 작다. 어떤 꽃잎은 겹꽃잎인 것도 있고 황색인 것도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의 사랑을 받아온 꽃에는 제각기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곁들어 있다. 봉숭아, 할미꽃, 백일홍, 해당화, 물망초, 연꽃 등의 내력이 그렇고 무궁화도 예외는 아니다.
옛날 하늘에서 내려 온 춘원왕자와 유화공주 남매가 백두산 천지(天池) 맑은 물가에 앉아 놀다가 왕자가 천지에 빠지자 공주가 자기도 모르게 화관(花冠)을 벗어 놓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훗날 공주가 화관을 벗어 놓았던 그 자리에 핀 꽃이 무궁화라는 것이다.
무궁화(無窮花)는 몹시 예쁜 꽃도 아니고 향기가 짙은 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색에 은은한 향기가 날뿐이다. 본래 꽃의 색깔이나 향기로 말하면 종족의 번식을 위해 나비나 벌을 영접하기 위해 생긴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꽃은 인간의 구경거리가 되어 때로는 ‘호박꽃도 꽃이냐’ 이런 식으로 푸대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예쁘다하여 꺾이기도 한다.
무궁화의 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은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삶의 열정이다. 그리고 가운데 뾰족하게 올라 온 꽃 심지는 그 열정을 상징하는 탑이다.
비록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지만 새로 뒤 따라 피고, 이어 피기에 언제나 줄지 않고 새로운 꽃을 가득히 선보인다.
세상의 모든 꽃잎들은 피어 있는 상태에서 한 잎 두 잎 하염없이 낙화한다. 그러나 무궁화 꽃잎만은 지기 전에 시든 몸을 단정하게 아물리고 대지로 돌아간다. 이제 곧 피려 함인지 지려함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깨끗한 한 폭의 낙조(落照)와도 같다.
국화(國花)는 국민 모두가 좋아하고, 국민의 정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나라 꽃’이다.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는 개화기가 7월부터 찬 서리 내리는 10월까지로 일명 근화(槿花)라고도 부르고, 나라 방방곡곡에 피기에 우리의 강산을 근역(槿域·무궁화 동산)이라 일컬어왔다.
일제 때 “독립"이란 말을 알아차린 일본경찰 과 일본인의 눈치를 피하기 위해 독립이란 말 대신 한국인끼리 “무궁화"니 “백두산"이란 은어(隱語)를 사용했었다. “무궁화 꽃이 언제 피려나", “백두산 호랑이가 나올 때가 됐는데"
그러나 눈치 챈 일제는 1942년 전국 지방 경찰서에 훈령을 내려 무궁화를 뽑게 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 무렵 독립을 염원하는 내용의 가곡인 「봉선화」(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도 금지곡으로 묶었다. 이렇듯 이 무궁화는 일제하에서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처럼 무궁 무진하게 피고 또 지고 있다.
무궁화는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자생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하와이에 이민 온 우리 동포들이 향수목(鄕愁木)으로 무궁화 묘목을 가져와 심기는 했다. 풍토 관계로 5-10월까지 피는 ‘앉은뱅이 무궁화’가 그것이다.
지금은 본토까지 이 앉은뱅이 무궁화가 관상목(觀賞木)으로 보급되어 너서리에서 히비스커스(Hibiscus)또는 샤론 로스(Sharon rose)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그러나 무궁화가 추한 몸이 되기 전에 꽃잎을 아물이고 대지로 돌아가는 순환의 이치를 알고 있는 미국 사람은 드물다.
나라꽃은 법으로 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풍토, 역사, 문화에 따라 자연스레 탄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국은 법에 의해 모란(牧丹)에서 매화(梅花)로 바꾸었다. 일본은 흔히 ‘벚꽃(사구라)’으로 알려져 있으나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菊花)도 나라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전체의 국화는 장미(薔薇)지만 독립성이 강한 스코틀랜드(엉겅퀴), 아일랜드(클로버), 웨일스(수선화)는 나라꽃을 하나씩 더 추가하고 있다.
미국은 주화(州花)는 있으나 나라꽃은 없다. 주화로 테네시 주는 창포꽃(일명 붓 꽃 : Iris), 아라바마 주는 동백꽃(Camellia), 조지아 주는 체러키이 장미꽃(Cherokee rose), 노스 케로라이나 주는 말채나무꽃(Dogwood), 사우스 케로라이나 주는 재스민꽃(Yellow jasmin), 훌로리다 주는 귤꽃(Orange blossom), 아칸사주는 사과꽃(Apple blossom), 미시시피 주는 목련화(Magnolia)이다.
무궁화는 쓸쓸한 울타리나 외로운 길가 아무데나 피어 쓸쓸하고 외로움을 덜어 주는 서민의 꽃이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고 새로 핀 무궁화가 필 때마다 오늘도 새롭게 맑게 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아 옷깃을 여미게 된다.
우리 다 같이 집집마다 우리 토종 무궁화를 심어 무궁화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후세들에게도 나라 꽃 무궁화에 대해 인식을 갖도록 했으면 한다. 피려 함인지 지려 함인지 모르는 겸허함과 깨끗한 자아청산(自我淸算) 같은 것 말이다.
/ikhchang@aol.com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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