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크라멘토의 여름은 유난히 뜨겁고 꽤나 길다. 긴긴 여름을 덥지 않게 나기 위해서 산이나 바닷가로 피서를 가기도 하지만 난 올해 여름은 솔바람에 나무가지가 제법 흔들리는 뒷 정원이 내다 보이는 커다란 거실 창가에 앉아 시를 읽으며 여름을 보냈다. 정호승, 이해인, 김용택,도종환, 홍인숙,황동규,고재종시인들의 시를 읽어 보기도 하고 인테넷의 여러 문학 사이트를 항해하며 새로운 글들을 접하는 기쁨도 가져보았다.내게 있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마치 선을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일의 하나이다.
잘 알고 지내는 후배가 얼마 전 LA 에 다녀 오면서 시집 한 권을 사다가 주었다. 문정희 시인이 엮고 해냄출판사에서 나온 ‘기생시집’이었다. 깔끔한 여인의 고운 매무새처럼, 하얗고 깨끗한 양장본이었다. 평상시 한시를 자주 접하지 못한 나에겐 모처럼 옛시를 음미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황진이 외에도 홍랑, 운초, 매창, 강강월, 매화, 송이등 우리에게 낯익은 기생들의 글을 모은 책이었다. 기생을 낮추어서, 말을 알아 듣는 꽃이란 뜻으로 해어화(解語花)라고 칭했다고 하지만 특별한 분야에 기예를 익힌 전문 기능을 가진 여성이라고 일컬어도 전혀 모자름이 없을 듯 싶다.
여름 내내 기생들의 한시를 읽으면서 우리 문학사에 크게 기여를 한 그들의 재능이 놀랍고, 사랑을 하고 사랑하던 님과의 이별의 슬픔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 부를 줄 아는 우리나라 여인들의 여심에 탄복했다. 오히려 그들의 시는 현대의 연시 보다 훨씬 자신들의 감정을 순수하고 거침이 없이 표현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그 중에 책 겉표지에 나와있는 선조조 때 부안 기생으로 있던 매창의 대표적인 사랑의 시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화우(梨花雨)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내 정령(精靈)술에 섞어 님의 속에 흘러들어/구곡간장(九曲肝腸)을 마디마디 찾아가며/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기러기 산 채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에 역력(歷歷)히 가르쳐주고/ 한밤중 님 생각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라//등잔불 그무러 갈 제 창(窓)앞 짚고 드는 님과 오경종(五更鐘)나리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아무리 백골이 진토(塵土)된들 잊을 줄이 있으리//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전문)
이 시를 처음 읽고는 그 옛날 남녀가 유별하고 사랑의 표현이 극히 제한된 조선시대의 시에 이토록 사무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녀 사이에서 사랑보다는 물질이나 현실적인 조건을 우선으로 앞세우며 사는 요즘의 우리와 판이하게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그들의 모습이 돋보였다. 가치관이 다양해지고 물질적으로 보다 많이 풍부해졌다고는 하나 우리들은 오히려 옛시인들의 글에서 사랑의 원형(原形)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찌는 듯한 새크라멘토의 더위 속에서 여인들의 다재다능함과 애절한 사랑에 흠뻑 빠져 있다보니, 어느덧 가을이 저만치 다가오는 줄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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