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동안 준비한 자료가 눈 깜박 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키보드 어디를 잘못 건드렸는지 서툰 솜씨로 스크린을 뒤지다 보니 맥이 빠져 버린다.
밖으로 나와 밤하늘별을 본다. 별 길을 따라 사라진 글 무리를 찾다보니 희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어른인체 하지만 친한 친구를 만나면 소년이 된다는 말처럼. 그를 생각 할 때면 나도 소년이 된다.
희수를 만난 것은 중학교를 입학해서 처음 맞은 봄 소풍에서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자리를 옮긴다. 나는 별안간 혼자였다. 아무도 없는 벌판에 선 느낌이었다. 우선 햇볕이나 피하고 보자 좀 떨어진 곳의 나무 그늘을 찾아갔다. 거기 미안(美顔)의 소년이 혼자 점심을 맛있게 먹고있었다. 그는 혼자라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 듯 했다. 좀 떨어져 앉으면서 도시락을 열었다. 이리와 같이 먹자. 그 아이는 나를 보고 선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다른 군(郡)에서 입학한 나와 같은 신입생 희수였다. 우리는 금방 친해져서 며칠 후 그는 우리 집으로 하숙을 옮겨왔다. 두 방을 터 버린 긴 방에서 친척 되는 형과 이종사촌, 나까지 넷이서 지내게 되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희수는 세수를 하고 발까지 뽀득뽀득 소리내며 씻는다. 그리고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출발선의 마라톤 선수 표정이 되어 책상 앞에 앉는다. 우리들도 덩달아 책상 앞으로 다가가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선수는 언제나 희수였다. 자다가 깨어 보면 그의 뒷모습이 산처럼 촛불을 가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숫제 밤을 홀딱 새워버린다. 공부하려고 태어난 아이였다. 공부에 원수진 일 있니? 하고 묻고도 싶지만 그냥 그의 등을 툭 쳐본다. 빙추리 같은 놈 그러면서 웃다가 다시 돌아선다. 빙추리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임마 친구라도 사귀고 그래라 한마디하면 너 하나면 됐어 그런다.
나는 그처럼 지조(?)를 지키지 못한다. 더구나 소풍사건 이후 다른 반에서까지 쓸만한 친구사냥을 했다. 그때 그룹으로 엮은 아이들이 지금까지 이어 온다. 희수를 데리고 친구들에게 나가면 물과 기름이었다. 친구들도 심심해했지만 문제는 공부 시간 빼앗겨 억울해하는 희수의 표정이 역력한 데 있었다. 당연히 희수 성적은 좋았다. 문제는 우리 집 창문을 똑똑 두드려 나만 불러내는 친구들의 점수를 더러는 넘어서지 못하는데 있다. 임기응변 학교성적만을 신경 쓰는 친구들과는 달랐다. 공부는 일상사 그의 인생 자체였다. 하루 하루가 시계 같은 날들이었으니 사실 그에 대한 추억도 별로 없다.
딱하나. 첫 여름방학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난 지 보름이 되어가던 날 편지가 왔다. 저녁이면 뒷동산에 올라 <그리워라 정든 벗> 노래를 부른다며 버스를 타고 와서 초촌면인가 하는데서 내려 자기 집을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우표가 붙은 편지였으며 처음 받아보는 초대장이었다. 이제 인정을 받는 나이에 이른 듯 그런 기분이었다.
담배라고 쓴 팻말, 유리창이 흙탕물에 찌든 구멍가게 앞에서 내렸다. 포플러들이 키 재기를 하는 뚝 길, 저보다 어림도 없이 큰 하늘을 담고있는 냇물, 확 트인 논길을 지나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임씨 마을의 초가집들. 희수 야아… 소리치니 사랑방문이 열리면서 희수와 똑같이 생긴 청년이 상(祥)이구나. 손에는 읽던 책을 들고선 서울 법대생 태수, 희수의 큰형이었다. 희수가 보고 배운 게 책보는 형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수는 모자도 똑바로, 교복도 단정, 품행도 방정, 빈틈없는 모범생이었다. 흠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속내를 들어 낼 수도 없는 재미없는 친구였다. 공부하는 그의 옆에서 교과 외의 책만 보다가도 바람든 망아지처럼 쏘다녀도 머리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건 책상의 붙박이 희수였다. 희수가 타지의 명문 고교로 진학했을 때는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몇 번의 서신이 오고가다가 연락마저 두절되어 버렸다.
희수는 대학생이 되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 소식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 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공부가 그의 젊음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 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고 보니 길고 짧은 의미가 뭐 그리 대단한가. 그러나 이상도하지 세월이 가면서 고통스러울 때면 영락없이 희수 생각이 난다. 어쩌면 그는 내 가슴에도 붙박이로 남아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건 아닌지 요즈음은 그런 생각도 든다. 희수는 그가 찾아간 나라에서도 틀림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으리라. 혹시 이 자료도 나를 놀리려고 이 친구 가져 간 게 아닐까. 방으로 돌아와 힘차게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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