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에서 자주 보던 많은 사람들이 얼마 전 한국을 다녀왔다. 이번에 전해들은 서울소식은 재미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주 메뉴가 대통령 욕하기, 서민경제의 어려움, 태풍 피해 등이다. 특히 단체로 수해지역인 부산과 동해안 일대를 둘러 본 사람들이 많아 태풍 매미 이야기는 여간 생생한 게 아니다.
마산 앞 바다는 해일이 덮치는 바람에 20미터 높이의 파도는 뿌리가 뽑힌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바다에 떠 있던 아름드리 원목이 상가의 지하 4층 주차장까지 폭탄처럼 쓸려 내려가고, 말 그대로 집채만한 파도에 떠밀려 배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거나 안방까지 밀고 들어왔다고 한다.
군인들이 복구지원을 나왔지만 원목 하나를 끌어올리는 데 10여명이 파김치가 될 정도여서 지휘관이 병력투입을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쯤 일이 벌어지면 미주 한인사회에서 연중 되풀이되는 일이 있다. 바로 수재의연금 모금이다. 미국에도 민간차원의 구호 캠페인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재난이 닥치면 연방비상관리청(FEMA) 같은 정부기관이 발등의 불은 우선 꺼준다. 따라서 태풍 피해를 거국적으로, 해외동포까지 나서서 돕는 것은 다소 독특한 한국만의 연례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수재의연금을 모으는 일이다. 돈은 대부분의 사람이 목숨 다음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웬만큼 마음에 와 닿는 메시지가 없으면 호주머니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돈의 위력을 아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수재의연금 모금은 언론기관의 몫이다. 한국사회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일이긴 하나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웬만큼 알려진 일이어서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우선 의연금 내는 것도 시범조가 있어야겠기에 모금 초기에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사간의 모금경쟁이라도 붙으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한국이나 여기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콜을 받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하는 쪽은 또 어떻겠는가. 몇 년에 한 번 정도면 몰라도, 매년, 심할 때는 일년에 두 어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이건 숫제 고행이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한국에서는 신문협회, 이곳에서도 한인단체와 언론사들이 모금창구를 하나로 묶는 바람에 수재의연금 모금의 거품이 많이 빠졌다는 것이다.
기탁자 명단도 본문 활자 정도로 얌전해 지고, 기탁자가 꼭 바라는 경우가 아니라면 얼굴 사진도 빠졌다. 유력인사의 애매모호한 ‘금일봉’이란 말 대신, 10달러면 10달러라고 기탁금액도 또록또록 밝혔다. LA에서는 어느 언론사로 가져가든 명단은 똑 같이 실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모금 행태가 바뀌자 우선 한국에서는 정치인, 한인사회에서는 한인 단체장들이 기탁자 명단에서 빠졌다. 일만 생기면 경쟁자의 눈치를 살피는 한인은행들도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이번에는 모두 입을 씻었다.
그 때문인지 기탁액수는 크게 줄었다. 지난해 10월 신문철을 뒤져보니 작년 홍수 때는 LA 한국일보에 기탁된 수재의연금만 28만달러를 넘었으나 올해는 현재까지 그 10분의1 수준이다.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올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지난 30일자로 모금을 마감했다는 LA 한인회가 집계한 LA 지역의 수재의연금 총액도 20만달러 정도다.
권유가 없고, 홍보 효과가 덜하다고 해서 수재 의연금을 내지 않을 일이라면 빠질 사람이 빠진 것은 잘 됐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이렇게 됐어야 할 일로 수재의연금 모금은 이번을 계기로 모처럼 제 자리를 찾은 걸로 보인다.
문제는 수재의연금 모금 하나가 제 자리를 찾는데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리고, 숨이 가빠야 했느냐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제 자리를 찾아야 할 일이 주위에 산재해 있지만 아직 제 자리 찾기가 요원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안상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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