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는데 왜 날씨는 푹푹 찌고, 말이 살찐다는데 왜 내가 살이 찌는지 모르겠다.
천고마비가 아니라 ‘천고아(我)비’의 계절인가. 갑자기 더워져서 여름옷을 꺼내 입었더니 불과 두어달전 편안했던 옷들이 허리춤에 꽉 끼면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엊그제부터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거울을 꽉 채우기 시작한 것이, 오랜만에 머리를 짧게 잘라서 그래 보이겠지, 하며 애써 모른 척 하려해도 이제는 숨길 수 없는 크기로 불어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식사양이 늘었고, 집에 돌아오면 왠지 나른하고 피곤하여서 저녁식탁 치우고 나면 책을 손에 잡는가 무섭게 이도 못 닦고 소파에서 곯아떨어진 날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잖아도 우리 나이엔 뭘 먹기가 무섭게 살로 가고, 그걸 떨어내기 위해선 몇배의 노력과 피나는 절제가 필요하지 않은가.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우리집 몸저울은 얼마전부터 작동을 거부하고 있다. 산 지 오래되긴 했지만 하루에도 여러번 거구의 두 남자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애꿎은 저울만 구박해대니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바늘이 움직이는 재래식 체중기가 아니라 올라서면 몸무게를 숫자로만 알려주는 디지털인데, 신기한 것은 남편이 올라서서 몇번 힘을 주면 무게에 짓눌려서인지 숫자가 나오는데 나는 아무리 올라서서 발을 구르고 콩콩 뛰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몇 달째 체중을 달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 또한 별로 없다.
그런 반면 남편은 하루도 빠짐 없이 체중을 재는데 그 때마다 혼자 재지 않고 반드시 아들을 불러세운다. 이리와라, 달아보자 하는 고함소리를 신호로 아이는 싫건 좋건 저울에 올라서야 하고 거기에 나타난 숫자에 따라서 늘었네, 줄었네, 그만 먹어라, 잘했다, 잔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자기는 살을 빼야할 입장이고, 아이는 계속 커가는 시기이니 비교할 군번이 아닌데도 굳이 단체행동을 하고 연대책임을 묻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남편은 올해초부터 조깅과 테니스를 열심히 한 결과 15파운드를 뺐지만 얼마전 그중 상당량을 도로 붙였다. 10월초 롱비치 마라톤의 해프 마라톤에 출전한다고 일주일 전부터 고기 내놔라, 국수 해내라 하면서 신나게 먹은 것이 원인이었다. 마라톤 뛸 때는 일주일전부터 식이요법에 들어가 3일간 단백질만 섭취하고 나머지 3일간은 탄수화물을 많이 비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마라톤 직전 며칠동안 하루 세끼 밥, 스파게티, 국수를 먹으면서 한밤중에 라면 끓여먹기도 서슴지 않더니 마라톤 뛰러 가던 날에는 수모 선수 비슷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도 13.1마일을 2시간46분에 완주하고 돌아왔으니 며칠동안 절뚝거리며 다닌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연말은 다가오고, 몸은 무거워져 밥하기가 유난히 싫어지는 이 가을. 밥 한 공기에 국 한 그릇, 김치 한 종지 놓인 소박한 밥상밖에 차릴 수 없었던 옛 어머니들이 부러워진다면 너무 배부른 소린가? 몇 달전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이렇게 감명 깊은 글은 살아생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데 쓰자
이 내용을 과연 우리집 식탁에 적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남편과 아들은 화를 내며 이렇게 고쳐 쓰리라.
식사를 더 많이, 더 맛있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푸짐하게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얻은 체중과 에너지는
TV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집에서 뒹구는데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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