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아전인수 게임이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은 외교회담에 꼭 어울린다. 외교적 표현은 항상 애매해 코에 걸면 코 고리, 귀에 걸면 귀고리다. 외교의 성과는 그래서 언어적인 표현보다 비언어적인 행동이 평가의 기준이 될 때가 많다. 그런 기준 중의 하나가 의전이다.
예를 들어 파티에서 호스트의 오른쪽에 앉느냐, 왼쪽에 앉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 대통령을 불러 만찬을 열었다고 하자. 미국 대통령을 왼쪽에 앉히고 러시아 대통령을 오른쪽에 앉힌다면 아마 미국 대통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갈 것이다.
어디서 만나느냐, 이것도 중요하다. 수도로 불러들이지 않고 지방도시에서 만나면 주최측이 그 회담을 별로 중요시 않게 여긴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시다. 과거 한국 대통령들이 하와이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제대로 된 정상회담이 아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노태우 대통령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준 것은 한국 대통령에겐 망신에 가까운 대접에 속한다.
미국 대통령이 “나는 정말 귀하와 친합니다” 할 때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며 대통령 개인 별장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것도 극진한 대우에 속한다. 부시가 얼마 전 고이즈미 일본 수상을 텍사스 자기 목장에 초청하여 회담을 가진 것은 미국의 일본 신뢰를 표시하는 잣대라고 할 수 있다. 레이건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샌타바바라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 초청했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일반적으로 영국 여왕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상대방을 만나는데 어디까지 나가 마중하느냐는 것도 대접의 무게를 재는 척도다. 예를 들면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의 예방을 받을 때는 건물 아래층 현관까지 마중을 나간다. 그러나 수상은 34층 사무실 앞 엘리베이터에서 맞이하고 그 외 사람은 사무실에서 만난다.
회담의 시간 길이도 의미를 갖는다. 미국 대통령이 방문객을 맞아 환담하는 것은 보통 15분으로 되어 있다. 외국 원수의 경우는 30분에서 1시간이다. 만약 회담이 2시간씩 계속되면 뭔가 진지하게 토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시가 DJ를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여 냉대 받은 것으로 해석된 적이 있었다.
요즘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이 많다. 전투병력 아닌 재건부대를 보내기로 한데 대해 미국이 “섭섭하게 여긴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파병하는 것만도 감사해 하고 있다”는 등 엇갈린 시각이다. 특히 엊그제 서울에서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에서 럼스펠드 국방이 “한국측 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대답을 피했다 하여 미국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등 추측이 난무다.
외교는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표정과 행동이 중요하다. 럼스펠드의 표정이 말이 아니다. 유머도 없다. 한국측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에 짜증나 하는 얼굴이다. 왜 이렇게 말이 많고 질질 끄는가. 당신네들 마음대로 해보시게. 이런 표정이다. 더구나 청와대와 국방부, 외교통상부의 의견이 모두 다르다. 외교적인 눈으로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시간을 끌어가며 파병을 늦추면 이라크 정세 변화에 따라 파병 안 할 수도 있다고 한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남을 돕는 데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걸 놓치면 도와 주고도 생색이 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너무 시간을 끌어 이제는 파병해도 미국이 별로 고마워할 것 같지가 않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 미숙이다. 미국은 한미 공동성명서에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표정과 행동은 차갑기 짝이 없다. 한미관계가 권태기에 접어든 것 같다.
이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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