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2004, Herbert Choy served on 9th Circuit Court
3월 12일자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1면 귀퉁이에 이런 제목과 함께 낯익은 인물 사진이 실렸다.
하와이의 한 유명인사의 부고 기사였다. 아니, 허버드 최 판사라면 바로 그....
내가 허버트 최판사를 처음 만난 건 98년이었다.
당시 ‘하와이 한인이민의 뿌리를 찾아서’ 라는 기획기사를 준비 중이었고, 나는 최판사를 그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로 손꼽고 있었다.
한인 미국이민의 연륜도 100년이 다 되어가는지라, 한인들 가운데에도 주류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뚜렷한 활동을 했거나 또는 그때까지 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않았다.
나는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은 단연 최판사라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그는 한인 이민자의 자손으로서 처음으로 주류사회 법조계에 우뚝 서있었다. 우리보다 이민연륜이 훨씬 더 긴 중국과 일본 커뮤니티를 포함한 아시안 커뮤니티 전체를 통틀어서도 연방 판사에 임명된 것은 최판사가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시안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으나 최판사가 그 벽을 허문 것이다.
약속된 인터뷰 날짜에 맞추어 연방빌딩으로 갔다. 순회법원 건물로 들어가려 하니 시큐리티 가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런저런 일로 최판사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안내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또 다른 안내자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서 어떤 방으로 들어가니 최판사의 비서가 맞아주었고, 잠시 후 온화한 표정의 최판사가 나타났다.
그는 오는데 불편을 없었느냐며 마치 친 할아버지처럼 물어봤다. 내가 잘 찾아오게 하기 위해 미리 지시를 내리고 안내자를 보낸 그의 배려가 참 고마웠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인터뷰할 내용을 미리 알려준 대로 그는 답변내용을 철저하게 손으로 직접 써서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해를 돕기 위해 집안 가계도까지 직접 그려서 자신의 조부모와 부모, 가족들을 한분 한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사무실 벽에 걸린 액자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변호사 시험 합격증서, 다양한 감사패와 상장, 상패와 함께 액자 속에 빛 바랜 재단사 자격증이 한 장 있었다.
판사의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재단사 자격증. 이상해서 물어봤다.
그것은 최판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것이고,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오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며, 그래서 그 액자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무것도 모른 채 하와이로 이주했고, 14살의 나이에 하루 12.5센트의 임금을 받으며 파인애플공장에서 일했고 양복점을 한 아버지의 뒷바라지로 하와이대학과 하버드 법대까지 졸업한 후 한인 최초, 아시안 최초로 주류사회 법조계에 우뚝 선 허버트 최 판사,
그는 이제 떠났지만 그의 이름과 개척정신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김용우 보도부 차장
라디오 서울 AM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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