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희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18세기 사랑과 정열의 시인 하이네 집을 방문한 친구가 무척 놀랐다. 서재에 십 여명의 어린이들이 가득 차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말하기를 “자네에겐 아이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어찌 된 건가?” “동네에서 데리고 온 아이들일세. 나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나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의 얼굴을 보면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서 가끔 어린이 파티를 하는걸세” 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어린이나 아기는 장차 미래의 주인이기 때문에 어린아이 얼굴 속에서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속담에도 집안에 아기우는 소리, 책 읽는 소리, 일하는 소리가 들려야 그 집안이 살아 있다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신기하고 감격할 일이 많지만 아기의 얼굴과 어린아이 노는 모습을 보는 만큼 흥분과 기쁨을 안겨주는 일은 없는 듯하다. 작은 콧구멍으로 새근새근 나오는 숨소리는 생명의 소리처럼 신비롭다. 위대한 조물주의 창조가 아니고는 누가 이렇게 섬세하고 미묘한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어느 것이나 태어나면 자라고 뻗어 가는 힘과 본능이 있지만 아기는 어머니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닻과 같다. 그래서 여자가 가장 행복할 때는 아기를 사랑스럽게 보듬어 안고 들여다 볼 때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성(聖)스럽기 까지 하다.
때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기의 웃음은 인간을 낙천적으로, 또한 성숙하게 만든다. 그래서 순수한 동심의 세계는 영원히 아름답다. 성경은 “너희는 세상을 바꾸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젠 나도 은퇴하여 바쁘게 동동거리던 생업과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니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느낄 때가 많다. 손주를 베이비싯 하며, 아기의 웃음과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힘들고 고달팠던 이민의 삶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또한 지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손주의 재롱과 웃는 얼굴을 보면 온갖 몸과 마음의 아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 할 때가 많다. 그리고 늘 강건한 믿음으로 늘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앞으로의 인생여정을 걷고 싶은데 때로는 부모는 영원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허무하고 쓸쓸한 마음도 든다.
그러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손주의 얼굴을 보며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면서 주어진 삶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shpyu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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