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보조 7년만에 영주권도 받고 식당도 개업한 박영자(맨 왼쪽)씨와 남편, 딸, 손자. <이의헌 기자>
토요 화제
“울고 싶을때마다 딸 생각하며 참았죠”
“50살 넘어 미국에 온 뒤 울기도 엄청 울고 인생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IMF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 보낸 딸의 학비를 충분히 못 보내주는 게 안쓰러워 무작정 미국에 건너온 뒤 사모님 체면도 버리고 주방보조로 일한 억척 아줌마가 미국생활 7년만에 영주권을 취득하고 식당도 차렸다.
이제 막 아메리칸 드림의 첫 단추를 끼운 박영자(58)씨는 “피할 수도 있는 길이었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면서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돼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건너오기 전 박씨는 제법 큰 자동차 부품대리점을 운영하는 남편 덕분에 사모님 소리가 익숙한 삶을 살았다.
산본동 부녀회장과 시의원 비서실장으로 봉사하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안 하고 살았다.
1998년 미국에 건너 와 식당에 취직할 때만 해도 내심 매니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어도 못하고 미국 경험도 없는 박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방 보조 밖에 없었다. 박씨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딸만 없었다면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 3년 동안은 너무 힘들어 울다 잠든 날이 더 많았다. 하루에 2,500명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일했고, 새우 같은 뾰족한 재료를 다듬느라 세 갈래로 쪼개진 엄지손톱은 다섯 번이나 빠졌다. 7년 동안 여행 한번 못 갔고, 딸 결혼식 날에도 잔치 음식을 손수 준비하느라 새벽 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주방에서 일한 뒤 4시에 열린 식에 참석했다.
박씨의 이런 노력에 감동 받은 식당 주인은 딸의 공부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박씨를 주방장으로 승진시켰고, 이례적으로 취업비자와 영주권 스폰서도 해줬다. 지난달 영주권을 받은 박씨는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식당도 오픈 했다.
“미국사람들은 매일 고기만 먹고 파티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겪은 미국은 적막하고 살벌한 곳이었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주방보조 생활 7년만에 내 식당도 차리고, 가족들도 다 미국에서 자리잡을 수 있게 돼 이제는 조금씩 정이 드네요.”
주방 일을 하면서 손가락에 상처를 너무 많이 입어 영주권을 신청할 때 지문을 다섯 번이나 찍어야 했던 그는 “나보다 어렵게 이민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웃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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