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에 있는 단체에는 회장이나 이사장 등 그럴듯한 직함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그 뒤에서 잔일이나 뒤치닥거리를 하는 숨은 봉사의 손길도 있다. 봉사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단체마다 찾아다니며 이런 일을 해 온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7순을 바라보는 고령의 김순재 여사이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북동부 지회 행정부장, 재미한국부인회 수석부회장, 6.25 참전 유공자회 총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그러나 이 직책은 오랜 봉사생활 끝에 붙여진 이름일 뿐 여전히 그는 각 단체의 잔일과 뒤치닥거리에 여념이 없다.
김씨가 단체의 일을 시작한 것은 1991년 재미한국부인회 회원으로 등록하고 봉사의 일을 하면서 부터이다. 또 다음 해는 상록회에 나가서 봉사를 시작했고 그 다음 해에는 새생활 상담소에서 봉사일을 하는 등 활동을 넓혀갔다. 그리고 1995년 6.25참전동지회의 결성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광복회 설립에도 참가했다. 1997년에는 플러싱한인회에서 총무담당 부회장으로 일했으며 2004년 재향군인회의 사무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단체에 발을 걸쳐놓고 왔다 갔다 하다보니 플러싱 일대에서는 마당발이 되고 말았다.
김씨는 15년간의 봉사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고 보람을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무연고자로 전전하다가 사망한 재일교포를 화장하여 일본에 있는 아들을 수소문하여 유골을 전해준 일이 있으며 역시 무연고자로 사망한 한인을 화장하여 한국에 있는 딸에게 전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암에 걸린 불체자 여성의 치료를 위해 엘머스트병원에서 수속을 하여 무료 치료를 받게 해 주었는데 그 여성이 암을 치료한 후 한국에 돌아가 지금도 잘 살고 있다면서 가슴 뿌듯해 했다.
이렇게 봉사생활을 하면서 김씨는 상도 많이 받았다. 뉴욕한인회, 재미한국부인회, 플러싱한인회, 상록회, 6.25참전동지회, 롱아일랜드 6.25참전동지회, 재향군인회, 커뮤니티 보드 7, 미국 국방부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의 표창장도 받았다.군대 출신도 아닌 여성인 그가 6.25참전동지회와 재향군인회 같은 군 출신자들의 단체에서 일하게 된 것은 6.25참전동지회를 만든 탁한관씨의 부탁 때문이었다. 집안끼리 내력을 잘 알고 지내던 탁씨가 김씨에게 도움을 청해서 기꺼이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군 출신과 어울리면서 김씨는 ‘김대령’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재향군인회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김씨는 사비를 들여 플러싱 41애비뉴에 재향군인회 사무실을 마련했고, 이 사무실에 기거하면서 밤에는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연락을 받고 낮에는 사무실 일을 돌보면서 그야말로 밤낮없는 봉사를 하고 있다. 그가 재향군인회에 몸담고 있는 동안 분규가 일어 괴로움도 많았으나 결국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북동부 지회로 정식 승인이 남으로써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어려움 속에서 받았던 도움에 보답하는 마음이라든지 신앙적인 차원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이름이라도 내고 싶어서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봉사생활을 하게 된 사연은 남달리 특이하다.
한국에서 남편이 치과를 개업했고 또 양복점과 예식장 등 사업을 하여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던 김씨가 미국에 이민하게 된 것은 1남1녀의 자녀교육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1982년 워싱턴에 정착한 김씨는 남편과 함께 가죽제품으로 사업을 하면서 이민생활에 자리가 잡혀갔다. 그러던 중 남편이 갑상선암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나자 김씨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지게 되었다.남편과 워낙 금슬이 좋았던 김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밤낮 슬픔에 젖어 울음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1991년 오빠와 조카들이 있는 뉴욕에 왔다. 그러나 뉴욕에서도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까지 기도했었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 끝에 찾은 방법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슬픔과 외로움을 잊자고 봉사생활을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그래서 봉사는 그에게 새로운 생활을 열어준 삶의 방식이었다. 그가 봉사생활에 목숨을 걸다시피한 데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김씨는 울산 김시로 인촌 김성수 선생과 같은 집안이며 가까운 친척이라고 한다. 그는 국가사회에 많은 공적을 남긴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남달리 크다. 그래서 자신도 무언가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가 광복회나 6.25참전동지회, 재향군인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란다.
김씨의 봉사가 이런 봉사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으로만 봉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돈을 써가면서 봉사를 해왔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 100~200켤레의 양말을 사들고 미국병원의 환자들을 찾은지도 10년이 넘었다.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웬만큼 있던 돈도 이제는 거의 다 써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이런 봉사생활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하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한 봉사이기에 누구에게도 떳떳하고 남을 위한 봉사였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지켜준 봉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의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지만 정작 자신이 아플 때는 약 하나 사다줄 사람이 없다고 그는 노년의 쓸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계속 봉사활동을 하겠느냐고 물으니 “나를 필요로 한다는데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봉사를 하겠다는 것이 그의 바램이라고 했다.
<이기영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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