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5일은 한국의 운명을 결정했던 인천 상륙작전 60주년의 날이다. 그 성공적인 결과로 오늘날 한국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세계 제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여 선진대국의 일원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맥아더 장군의 노력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이를 망각하고 일부 진보파라고 자칭하는 세력들이 맥아더장군을 남북의 통일을 방해한 원수처럼 여기며 인천시내 자유공원 내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을 미국의 국치일인 9월 11일을 기해 폭파하겠다며 동조세력들의 집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인천 상륙작전이 얼마나 힘들게 수행됐는지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발발 5일째 한강 남쪽 언덕에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면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면 올수록 보급이 힘들게 될 것이므로 적의 주력부대를 포위하여 섬멸할 생각을 했다. 7월23일 맥아더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수행키로 결심하고 워싱턴에 전보를 쳤다.
며칠 후 미합동참모본부의 참모인 육군참모총장과 공군참모총장은 맥아더장군의 작전계획을 들어보기 위해 도쿄의 극동사령부에 왔는데 그들에게 2개 사단의 병력을 더 보내줄 것을 요구하니 미국내 예비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며 전투를 크게 벌이지 말고 한국과 일본에 있는 병력만으로 수행하라고 했다.
백악관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8월초에 거론됐고 적은 8월15일까지 완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에 낙동강 근방에 10만명의 병력을 집결하고 있었다. 8월23일 최종적인 계획을 듣기 위해 여러 장성들이 모인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연설에서 말했다.
“인민군의 대부분이 부산 근방에 집결되어 있다. 적은 후방인 인천 방위를 적절히 하지 못하고 있다. 인천 상륙작전에 대해 여러 이론이 있으나 나는 불의의 습격을 가해 이길 자신이 있다. 적은 우리가 이런 공격을 무모하게 해 오리라고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해군은 제2차대전 때 이런 곤경을 상륙작전으로 극복해 승리했다. 이런 승리를 인천에서도 할 수 있다.”
그 당시 맥아더 장군이 장개석 총통이 국민군 3만명을 보내겠다는 것에 환영한데 대해 트루만 대통령은 반대하고 맥아더 장군을 견책하기 위해 해리만 특사를 동경에 보냈는데 그는 워싱턴으로 돌아가 맥아더 장군에 감동 받아 대통령에게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승인토록 요청하였었다.
상륙 전날에 해·공군의 무서운 최후의 포격·폭격 지원을 받은 후 드디어 D-데이인 9월15일 아침, 월미도 상륙에 성공하여 오늘날 한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희호/뉴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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