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가 어제 총선을 치렀다. 미군의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지 33개월만의 일이다.
총선까지의 여정은 이라크는 물론 미국에게도 버겁고 험난했다.
미국측 집계에 따르면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전 개전 이후 3만여명에 달하는 이라크인들이 숨졌고. 2,148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1개월마다 1,000명에 가까운 이라크인과 60여명의 미군이 죽어간 셈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끔찍한 희생이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총선이 이라크의 유혈사태에 마침표를 찍으리란 보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총선을 통해 새로운 권력구도가 탄생하면서 종파간의 갈등과 반복이 증폭될 소지가 많다. 민주주의라는 허울 아래 지배집단만 바뀐 억압적 체제가 그대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와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치하에서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진 수니파의 갈등에 자치권을 확대하려는 북부지역 쿠르드족의 이해가 충돌하면서 나라 전체가 내전의 회오리에 휩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지극히 불안정한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날로 거세지는 국내 반전여론에 밀려 미군 철수의 시점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후세인 정권 와해 이후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쿠르드족 등 ‘동상이몽’을 지닌 세 집단을 총선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니뭐니해도 현지에 배치된 16만명의 미군이었다. 이들의 철수가 단행될 경우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이라크 정치권력은 외풍을 막아줄 방어막을 잃고 만다.
그러나 ABC방송과 뉴욕타임스의 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라크인의 80%가 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주인이 폭력까지 동원해가며 “방을 빼라”고 난리를 피우는 형국이다.
게다가 미국의 ‘이라크 경영’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눈길은 여전히 냉랭하고, 국내의 반전여론은 그의 지지율을 짓누르고 있다. 내년도 중간선거를 앞두고 워싱턴 정계의 전반적 기류 역시 철군 ‘불가’에서 ‘불가피’ 쪽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부시 대통령은 14일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WMD)에 관한 정보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잘못이며 전적으로 내 책임이지만 침공 결행 자체는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와 행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이라크전 당위성 조작 의혹이 기술적 실수였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부분적 실수는 인정하나 전체적인 구도는 제대로 된 것이니 “이라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참아달라”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사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올인’한 상태다. 이제까지 전비로 투입한 혈세만도 2,000억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여기에 국방부가 추가로 신청한 예산까지 합치면 5,000억달러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로 인해 클린턴 행정부 시절 흑자였던 국가 재정은 사상 최대의 적자로 돌아섰고, 집권 2기의 핵심 국내정책으로 내걸었던 소셜시큐리티와 의료보험 개혁 등이 재원부족으로 줄줄이 발목이 잡혀 있다. 이라크에서 한 건을 건져 올리지 못하면 그는 ‘열등생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악착같이 이라크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전사자 집계와 매달 평균 70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전비가 생생하고 구체적인 손실로 다가오는데 비해 부시 대통령이 외치는 ‘이라크에서의 승리’는 감조차 제대로 잡기 힘든 게 문제다. 한마디로 변변한 여론 반전 카드가 없다.
미국인들에게 이라크의 총선은 장기적 의미부여가 힘든 허상에 불과하다. 이번 총선 결과에 관계없이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수렁이다.
이강규 국제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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