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의 분주함 때문인지 아그라행 야간 열차에 오르자마자 단숨에 자고 일어나니 벌써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한다. 옆의 독일인 할아버지와 방향이 같아 기차에서 내려 릭샤 합승으로 버스 터미널까지 가 때마침 대기하고 있던 카주라행 버스에 올랐다.
울퉁불퉁한 지방 도로를 무섭게 제압하며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 마냥 무지막지하게 달린다. 한참 가다 쉬어간다며 운전사는 시골 간이정류장에 딸린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간다. 운전사 맘이다. 나도 배가 고파 컵 라면 두개를 꺼내 뜨거운 물을 부탁하여 할아버지와 라면을 먹었다. 라면 국물까지 말끔히 비운 할아버지는 택시 타고 갔으면 이런 경험은 못했을 거라며 웃으신다.
카주라호는 인도의 유적지 중 가장 에로틱한 도시로 불리고 인도의 성애서로 유명한 ‘카마수트라’의 원전이 이곳 사원의 외벽에 새겨진 조각이라는 말에 안내 테입을 빌려 귀에 꽂고 가이드 없이 혼자서 한바퀴를 돌았다. 중간에 거리에서 파는 파파야와 석류를 짜서 만든 원조 생과일 주스로 목을 축이니 피곤에 지친 나그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된다.
나는 아그라로 가기 전 시골 한적한 도시인 오르차에 들러 가이드 없이 혼자 시내를 구경하며 하루를 푹 쉬었다. 새벽 5시에 짐을 챙기고 예약해 놓은 택시를 기다리다 보니 또 정전이다. 주인을 깨워 숙박료를 지불하고 어설픈 작별 인사를 하려니 이것도 매번 못할 짓이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로 가는 기차를 예약하지 못해 버스로 가려했는데 역에 나가 자리 없는 표를 사서 역무원에게 웃돈을 주고 자리를 달라고 하면 ‘No problem’이라는 주인 아저씨 말만 믿고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타인에게 신뢰성을 준다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상대방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들은 언제든 ‘No Problem’을 외치며 여행객을 즐겁게 해준다.
죽은 왕비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는 타지마할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거려 진짜 아그라시의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흰 대리석으로 된 건축물이 태양에 반사되어 사진의 뒤 배경색깔이 시시각각 다르다기에 정원에 누워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니 배는 고프고 다리는 아프고 누구 말처럼 나는 고생을 사서한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미리 예약해둔 릭샤 청년과 타지마할 뒤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흰 대리석에 아침해가 반사되어 배경이 오렌지색이 된다는 장관을 보기 위해 한 시간을 덜덜 떨면서 기다리고 있다.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10분마다 변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나는 진짜 고생을 사서한다.
볶음밥으로 아침을 먹고 아그라시 외곽에 위치한 파테뿌르 시끄리에 가서 현지 가이드를 구해 유적지를 들러봤다. 그 시대의 사연이 오늘의 역사가 되었고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인간과 신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절대적이었던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혹은 번성하게 하는 이유이고 그 시대상을 대변하는 누적된 빛 바랜 기억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사전 지식이 없으면 건물 외관만 볼 수밖에 없고, 책이나 정보를 구해 읽으면 책 속의 얘기만큼만 본다. 그래서 나는 늘 현지에서 가이드를 구한다. 그들은 펄펄 뛰는 살아있는 이야기의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책 속에 없는 수많은 구구 절절한 사연이 있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내일 아침 베이스 캠프인 델리 입성을 위해 잠을 청한다. 어느 어머니의 말처럼 나는 그들의 대리만족을 자청하여 등 떠밀려 나갔다가 공짜 선물에 연말 보너스까지 보따리로 얻어온 느낌이어서 혼자 독식할 수 없는 마음에 슬그머니 지면을 통해 돌려드린다. 그들의 변함없는 격려에 그 사랑의 빚을 갚았으면 하는 마음과 자녀와의 숨가쁜 일상에 잠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도 이제부터 No Problem이다.
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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