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날 찾아 온 한 마리 소
기억의 비 쏟아지는 들판 거닐다
웃돌게 자란 푸념의 잡초를 밟는다
술병들 사이 빈 잔 꾹꾹 채우며
“한형, 시골 가 농사나 지었으면 좋겠어”
파삭 삭은 얼굴 나를 앞에 두고 있다
술잔에 어리는 오래된 야망 굳어져
구겨 넣듯 창자의 벽 넘어가면
그렁그렁한 눈에 새벽 비 쏟아지겠다
우거지 세상을 살다 응고된 혈액
숭숭 구멍난 혈관을 통과하는 의식
덜 깬 취기가 선지처럼 부서진다
“김형, 열심히 선지 먹고 소 되자고”
소 된 할아버지 들판에 서 계시고
싱싱한 풀밭 같은 아침을 열어
팔짱끼고 걷는 두 사람의 네 다리
한길수(1962~) ‘해장국집에서’ 일부
전날 밤 시인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힘들어한다. 두 사람은 밤 새워 술을 마시고 우거지와 선지로 끓여진 해장국을 먹는다. 밤을 꼬박 새웠지만 시인은 결국 소처럼 열심히 일하자는 말밖에 해줄 수가 없다. 생략되었지만, 이 말은 1연에서 나오는 “게으른 사람은 죽어 소 된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주신 교훈이기도 하다. 팔짱을 끼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두 사람의 네 다리를 통해 보여주는 소의 이미지가 매우 인상적이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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