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지는 ‘20세기를 대표할 인물’로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선정한 적이 있다. 타임지가 아니더라도 그만큼 학계에서 인정받으며 일반에게도 친숙한 인물은 없다. 혀를 빼물고 어딘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사진은 유머가 있는 천재의 모습을 따듯하게 드러내고 있다. 1955년 그가 사망한 후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불행했던 개인적 삶의 행적은 계속 밝혀지고 있다.
1879년 날 때부터 머리가 너무 크고 이상하게 생겨 부모를 놀라게 했던 그는 9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암기식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취리히에 있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지만 낙방한다. 다음해 다시 도전, 합격한 그는 여기서 세르비아에서 온 유학생 밀레바 마릭을 만나게 된다. 자신보다 4살 많고 절름발이였던 밀레바와 사랑에 빠진 아인슈타인은 그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지만 기를 능력이 없어 고아원에 맡기나 곧 사망한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 결국 밀레바와 결혼한 아인슈타인은 한 때 그녀의 재정적 도움으로 생활한다.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 1905년 브라운 운동, 빛의 광전 효과, 특별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써내면서 그는 일약 스타가 된다. 전문가들은 이 중 하나만으로도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빛의 광전 효과’ 논문으로 후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지는 것과 비례해 가정생활은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한 때 연구 동료였던 아내를 하인처럼 취급하고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면서부터는 자신의 사촌 엘사와 바람을 피운다. 급기야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밀레바는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결국 밀레바는 나중에 노벨상을 받으면 그 상금을 위자료로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하고 아인슈타인은 상을 받은 후 약속대로 상금을 줬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맏아들은 평생 아버지와 의절하고 지냈고 정신병 증세가 있던 둘째 아들은 정신 병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1938년 큰아들마저 미국으로 이민 가자 밀레바는 가난 속에 홀로 둘째 아들을 돌보다 1948년 사망했다. 그녀의 부고란에 앨버트의 이름은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유산 관리자들은 1958년 맏아들의 아내 프리다가 그의 전기를 쓰자 그 출간을 막았고 10년 후프린스턴 대학이 그의 편지록을 출간하려 하자 이 또한 막았다.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 1992년 아인슈타인과 밀레바가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되면서 비로소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엘사의 딸 마고가 1986년 죽으면서 사후 20년이 되면 공개하라던 유언에 따라 아인슈타인의 편지 130통이 최근 출간됐다. 이에 따르면 박봉과 아내, 자식과의 갈등에 시달리는 아인슈타인의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도 결국은 인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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