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무진 한국여인 야물이’ <10>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양계에 따르는 또 한 가지 잡역은 계란의 무게를 재는 일이였다. 이것은 보통 아버지가 농장일과 채소밭 일을 하시다가 틈나는 대로 맡아 하셨다. 계란은 저울로 무게를 달아 1, 2등급으로 분리했다. 무거운 게 1급, 2급은 중간치였다. 너무 작거나 가벼워서 팔지 못할 계란은 어린 암탉이 나은 거였다. 합격품은 일단 30개들이 상자에 담고 그다음 이런 것 여럿을 크레이트에 넣어 닭사료상을 경영하는 가야(Kaya)씨한테 보냈다. 가야씨는 언제나 선박운송파업이 임박했다면서 안전 책으로 사료를 몇 자루씩 여분으로 가져다주곤 했다. 어머니는 가끔 “바스킷 그래쓰(하와이 말로는 호노호노 = honohono)”라 일컫는 즙 많은 덩굴 모양의 잡초를 썰어서 가야씨네 사료에 넣어주었다. 그러면 사료의 양도 늘어날뿐더러 노른자가 더 진한 색을 띠게 되었다. 그래도 운송파업은 잦아져서 사업에 지장을 주는 것 같았다. 파업이 있을 적마다 사료비가 오르고 쌀도 품귀현상을 일으켜서 상점에서는 쌀 판매를 배급제로 하게 되었다.
때때로 아버지는 Model T에 싱싱한 계란 상자를 올라아 농장 노동자캠프들이 있는 데로 싣고 가서 파셨다. 거기는 아버지가 일하시는 제분소 근처였는데, 우리는 자주 따라가 필리핀 아저씨들이 계란 사는 걸 구경했다. 그 아저씨들은 우리도 사갈 거라면서 짓굳게 골려주기를 좋아했다.
그러면 우리는 질겁해서 차 맨 뒤쪽으로 바짝 피했다. 일본인캠프에 도달할 쯤 되면 계란은 거의 바닥났다. 일본노동자촌은 대지가 작아도 집들이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계란을 다 못 팔아서 남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계란 파시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계란을 도매금에 사가기도 했다. 부모님의 친구 되는 어느 한인 부부는 일요일마다 체구가 듬직한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계란 두 타스씩을 도매금에 사갔다. 뭉환 오빠가 본즉, 그 중에 한 타스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랑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앉은 자리에서 거의 다 먹어치우더라는 것이다. “저런 장사는 필요 없어”라는 게 오빠의 말이었다. 일요일은 그분들이 시골로 와서 주말외유를 하는 날이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시골 사람답게 늘 그들의 방문을 반갑게 잘 대해주셨다. 한때는 유명했던 “올라아 스테이크 하우스”의 주인 겸 주방장은 우리 집에 직접 찾아 와서 자기 식당에서 쓸 계란을 최상품으로 골라 사가곤 했다. 그 식당 주인은 올 적마다 식당에서 먹거리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우리 집의 개들은 그를 보면 짖어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꼬리를 힘차게 내흔들며 반겼다. 놈들은 꼬리를 흔들며, 그러나 서로를 예의 주시하면서, 그가 가져다준 고기 뼈를 온종일 핥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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