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 째 영화 ‘천년학’ 12일 개봉 앞둬
임권택(71) 감독은 자신의 100번 째 영화가 상영되기 전 아무쪼록 곱게 잘 봐달라고 말했다. 한국영화의 산 역사라고 일컬어지는 노장 역시 새로운 작품을 내놓았을 때, 그것이 아무리 100번 째 영화라 할 지라도 두근거리며 설레는 감정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드디어 임 감독의 100번 째 영화 ‘천년학’(제작 영화사 KINO2)이 3일 시사회를 통해 첫 선을 보였다.(3월29일 영화계 후배들이 마련한 헌정 행사에서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대중을 향한 건 아니었다)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그 태생부터 ‘서편제’와 이어져 있다. 동호와 송화, 이들의 아버지 유봉의 궤적은 ‘천년학’에서 보다 세밀히 그려진다.
영화 ‘천년학’은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도 않고, 새로운 것의 발견에 들떠있지도 않은 채 묵묵히 인간사를 품고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렇게 만들어졌다. 청춘의 격정도, 중년의 고달픔도 이미 지나쳐 온 노감독의 인생이 그와 꼭 닮아있는 영화에 담겨 있다.
시사회가 끝난 직후 아직 정신이 없다는 임 감독을 만났다.
다음은 임 감독과의 일문일답.
--격정도 없다. 드라마도 강하지 않다. 그저 툭툭 던져준다는 인상이다.
▲ 유봉의 묘에서 8년 만에 만났을 때,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을 때 생길 수 있는 격정은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보는 이들이 미루어 생각할 수 있도록, 보는 이들이 자꾸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동호와 송화는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한다. 이 두 사람에게 만남이 주는 의미는 무얼까.
▲가정을 이루며 편안하게 사는 삶이 아닌 떨어져 사는 사람에게는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다. 만남과 이별을 통해 도무지 산다는 게, 만나서 기쁨을 얻는다는 게 도대체 뭔가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안티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칠순 노인의 삶을 보자. 노인의 죽음을 가장 장대한 느낌으로 찍으려 했다. 친일도 하고 평생 욕심을 채우며 살아온 노인 역시 부질없었던 삶이라는 걸 말하려고 했다.
--대사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서편제’ 보다 훨씬 소리가 중요하게 쓰였다.
▲소리를 두 사람의 삶 자체에 깊숙이 끌어당겼다. 일상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드라마를 배제한 채 소리와 만나서 극대화시킨 것이다. 비애스럽고 비탄스러운 삶의 여정을 그려가면서 ‘아름다운 비애’를 영화에 드러내고 싶었다.
--영화의 배경이 된 풍경이 굉장히 단순화돼 표현된 느낌이다. 제주도의 풍경도 단조로웠으며, 첫 장면에 등장한 추수가 끝난 논밭의 고즈넉함 등이 그러하다.
▲비탄스럽기 짝이 없는 삶이라 할 지라도, 그런 비애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그쪽에서 보는 아름다움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고통을 느끼며 살면 살기가 힘들테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느끼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풍경을 바라보았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마치 ‘한 폭의 한국화’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했다. 그저 풍경이 아름다워서 ,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에 들어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천년학’에 등장하는 풍경은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은 지나쳐 버릴 정도로 흔하디 흔해 별로 관심을 끌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인데 적시적소에 들어오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중동에서 돌아온 동호가 아들 기철이가 죽은 것을 알고 포장마차에서 단심과 헤어질 때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상투적인 이별이 아니었다. 동호 역의 조재현은 그 장면을 연기하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상투적인 연기를 하고 있었구나’라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단순한 감정의 노출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가슴앓이를 드러내는 표현들은 과장돼서도 안되고 모자라서도 안된다. 미우나 고우나 살을 붙이고 산 사람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나. 단심을 가슴에 한 번 품은 것은 양심의 가책일 수도 있다.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무엇인가.
▲모든 커트에 공을 안들인 것은 없다. ‘천년학’의 이야기는 강력한 드라마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 일상같은 이야기를 토막토막 들려주는데 어떻게 감동이나 감흥을 극대화시킬 것인지가 큰 과제였다.
--젊은 관객들이 감독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얼핏 지나쳐 보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다 못 볼 수밖에 없다. 요즘 ‘영화는 나이로 찍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든 만큼 세상을 보고,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를 새겨서 보면 ‘천년학’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작단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으셨다. 혹시 또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를 일이고.
▲사는 게 다 그렇다. 상처받고 견뎌내고 또 상처받고… .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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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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