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그곳은 평화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하고 뭐가 나올 것 같기도 한 그런 곳이었다. 마일레 레이(lei)를 만들어 팔던 부부가 들어갔다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곳이 바로 거기였다. 우리가 집에서 만든 점심을 가져다주는 김에 채소밭에서 동무해주는 시간 말고는 뭉환 오빠는 혼자서 밭일을 했다.
오빠가 재배한 토마토는 품질이 최상이었다. 크고 흠집도 없고 포동포동하면서 주스가 많았다. 토마토나무는 하나하나 땅속에 단단히 박힌 미끈한 구아바 나무막대기에다가 얽어매었다.
그렇게 해서 크게 자란 토마토가 일군(一群)을 이루면 흡사 작은 관목 같아보였다. 주렁주렁 열린 토마토는 싱싱하고 무슨 점 하나도 없고 땅에 닿질 않았다. 다 큰 것들은 따서 오렌지 색 상자에 넣었다. 한 상자의 무게가 족히 50파운드는 되는데 모두 하나씩 집으로 들고 와야만 했다.
오빠가 혼자 들어 나르는 적이 많았다. 한 번 수확에 토마토 14상자가 나왔다. 그때마다 오빠는 50파운드짜리 상자를 들고 편도 1마일되는 거리를 열네 번이나 왕복한 것이다. 가끔 이웃집에서 철로용 무개화물차를 빌려줘서 일단 철길까지만 가면 문제가 없었으나, 그래도 하늘이 안 보이는 어둑한 정글 계곡을 통과해서 철길에 도달하는 거리는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토마토 재배를 좋아했다.
그 컴컴한 골짜기만 제외하고. 한 번은 그 계곡에서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오빠가 우리를 되불렀지만, 거목들이 울창한 계곡 속에서는 우리를 찾지 못하고 그냥 밭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한참 뒤에 따끈한 점심을 들고 오빠 앞에 나타났다. 그런 뒤부터는 오빠가 나 아니면 윤성이가 자기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해서 내가 자원을 했더니, 오빠는 그 대가로 나에게 단어를 가르쳐줬다.
뭉환 오빠는 수박도 길렀다. 오빠는 뭐든지 기르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그러나 양계사업과 대가족살림 때문에 부모님의 재정은 많이 고갈되었다. 양계업은 좀 더 일찍 그만두지 못한 건 오빠의 만류(挽留) 때문이었다. 이후부터는 뭉환을 프랭크(Frank)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오빠 단짝친구의 아버지(목축장의 하와이계 카우보이 십장)가 지어준 이름인데, 오빠가 좋아해서 이제는 아무도 그를 출생 명(名)으로 부르지 않는다.
파나에바 숲에 주둔해 있던 군대가 철수해서 1943년 이후로는 그전같이 우리 집 근방에 군인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채권도 사고 빅토리 가든도 계속하고 통금시간도 잘 지켰다. 우리는 제 2차 대전의 군인들을 많이 만났다. 그 중에는 우리와 친해진 사람도 있고, 또 우리가 세탁을 해준 사람도, 먹여준 사람도, Model T 차에 태워 막사로 데려다준 사람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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