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제 6장 라우할라 수공예품 사업
우리 집은 빚이 많았다. 어머니 친구 두 분에게 진 게 천불 이상이었다. 1930-40년대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거액이었다.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이었다. 부모님은 마음이 초조해서 말다툼도 하고 세 가지 일을 맡아 하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는 일도 맡으셨다. 위험수당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는 곳은 하루 통근 길로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현장근무를 하셨다. 위험수당은 나와도 따로 사는 경비 때문에 이익 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일을 아예 저버리고 집으로 와서 근처 올라아 농원의 안정된 일을 택하셨다. 올라아 제분소에서 8시간 노동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순이 언니, 프랭크 오빠와 함께 양계를 돌보셨다.
채소밭도 잘 가꾸셔서 언제나 시장에 내다 팔고 식구들도 넉넉히 먹었다. 한동안은 돼지도 길러서 시장에 내다 파셨다. 부모님 두 분은 언제나 일을 해서 생활수준을 높이도록 하셨다.
어머니와 프랭크 오빠는 집안 재정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큰 부채를 벗어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고 싶으셨다.
큰 빚도 갚아야 되고 또 여유도 좀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양계사업을 끝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료 값이 너무 비싸려니와 그나마 사료공급이 선박과 부두노동자들의 사정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순이 언니는 벌써 대학에 다니는 중이고 곧 동생들도 진학할 차례가 되었다. 대학은 필수였다.
어머니는 여러 군데를 찾아다니며 여러 상점들을 잘 알아보고, 사업자들의 말도 들어보고, 가족이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보셨다. 농사는 먹는 데 보탬이 되기는 했으나 충족하지는 않았다.
가끔 어머니 앞으로 빚을 다 갚으라고 독촉하는 편지가 날아왔다. 어머니는 독촉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의자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이구, 아이구!” 우리는 화도 나고 걱정되었다. 그 당시 우린 애들이었다. 제일 위인 오빠가 15살, 윤성 언니가 12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의 곤경을 해결하는 일에 적극 합세할 수 있도록 빨리 성장해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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