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우리는 어린애들이었는데! (“직공 팀“에서는) 제일 위인 프랭크가 고작 열다섯을 넘긴 나이었으니. 하지만 한 주, 두 주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물건의 수요가 늘어났다.
서서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던 깊은 재정적 수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전액 갚아주었다. 프랭크 오빠와 윤성이가 빨리 기술을 습득한 덕분이었다.
순이 언니만이 라우할라 사업에 가담하지 않았다. 언니는 그때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한 입장이었다. 재학 시에는 줄곧 집을 떠나 힐로의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서 도우미학생으로 주급 5달러를 받고 기거했다.
그때 5불은 푼돈이 아니었다. 그 자리는 중학교의 어느 선생님이 소개해준 건데, 그분의 친척 되는 가정에서 학생도우미를 구하고 있어 순이를 적극 추천한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했던 것이다.
언니는 성숙하기도 하려니와 학업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식 때는 차석으로 개회사를 맡았었고 또 팔 남매 중 맏이기도 했다.
1942년 6월 고교 졸업 후에 언니는 친구와 함께 미 공군에 채용되어 셋방을 같이 쓰면서 항공기의 움직임을 모니터링 했다. 첫 월급이 아버지의 것보다 더 많았다. 언니는 부모님이 돈 꿔달라는 말씀을 받고 기분이 흐뭇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갈 때까지 일 년간 아르바이트하는 선례는 언니가 남긴 것이었다.
부모님은 우리를 어린애가 아니라 책임 있는 성인으로 취급하셨다. 나는 열두 살 적에 혼자 걸어서 등교했다. 철길을 지나 농장노동자촌까지 (약 1마일 거리) 걸어가서 내 단짝친구랑 같이 학교로 가곤 했다.
오후에 공부가 끝나면 언니/동생들과 함께 신작로와 시골길을 따라서 집에 갔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나더러 집에 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려서 호놀룰루의 하와이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순이 언니에게 돈을 좀 부치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시키신 대로 했다.
오후에 어머니는 그 돈을 “우편환”으로 부쳤느냐고 물으셨다. “우편환”은 그때 처음 들은 말이었다. 어머니는 당황해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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