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윤성이는 194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순이 언니의 전례를 따라서 대학 가기 전에 일 년 동안 알바를 했다. 그러다가 호놀룰루로 가서 대학을 다닐 적에는 순이 언니와 같이 셋방살이를 했다. 그때 언니는 공립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
이윽고 한성이도 라우할라 짜는 일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손이 제일 빠르던 선수가 집을 나간 그 엄청난 틈새를 메웠다. 어쩌다가 해변이나 시내구경을 가고 싶어지면 우리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라우할라를 짰다. 눈이 몽롱한 좀비(마법으로 되살아난 시체)가 된 상태에서. 맡은 몫을 다 끝내면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닷지 승용차를 몰고 2시 반에 외출했다.
여름에는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일요일은 라우할라 짜는 일을 면제받았다. 그래서 일요일은 <코코넛 섬> 해변에 가서 편히 쉬는 날이었다. 영흥이, 해리, 한성이 셋은 수영을 잘 했다. 아무도 아프다고 쉬는 법은 없었다. 그것은 편두통을 앓으면서도 참고 일을 한 윤성 언니가 남긴 전통이었다. 17세 때 나는 왼쪽 궁둥이에 종기가 생겼었는데, 그게 밖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속으로 자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매트를 계속 짜가지고 하루 몫을 채웠다. 종기가 자꾸 커져서 나는 앉지를 못하고 무릎을 꿇고 일을 했다. 끝내 힐로에 있는 마타요시 의원을 찾아갔다. 농장소속 진료소에 가면 무료였지만 거기서 일하는 잡역부 때문에 불편했다. 아무 근거도 없는 바보스런 생각이었으나 열일곱 살 적의 마음이 그랬다. 나는 혼자 차를 몰고 힐로로 가서 종기를 떼어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나중에 고지서를 받고 그 일을 아셨다. 엄마는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1951년에는 나도 호놀룰루로 가서 언니들과 합세했다. 그래서 집에 남은 인력이 더 줄었다. 하지만 우리는 호놀룰루에서 일거리를 받아 함으로써 축소된 인력문제를 보상했다. 우리는 시간이 날 적에 집에서 보낸 라우할라 줄기를 짰다. 윤성 언니는 일이 끝난 다음, 나는 수업이 끝난 다음에. 헬렌마저 호놀룰루로 올 즈음엔 라우할라 사업이 점차 수그러졌기 때문에 집에서 우리에게 일거리를 더 보낼 필요도 없어졌다. 1955년에는 막내 여동생만이 집에 홀로 남아 라우할라 짜기를 전담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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