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묘지의 높이는 자손들의 성공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글쎄. 잘 알 수는 없지만 한국이나 미국의 후손들이 다 잘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르긴 해도, 할머니는 아마 딸을 보고야 죽겠다는 의지로 버티신 게 아니었을까? 어머니와 종규삼촌의 특별한 유대는 두 분이 타계하실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 8장 김치사업
어머니는, 한성이 마저 떠나버리면 라우할라를 짤 사람이 없게 되리라는 걸 깨닫고, 1954년에 이미 그 대안으로 김치사업을 동시에 가동시킬 참이었다. 김치는 어릴 적부터 익히 아는 것이고 또 줄곧 먹어 온 음식이니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동네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머니의 김치를 격찬했었는데 차제에 그 맛나는 김치를 상업적으로 전환하라고 모두들 힘을 실어주었다.
어머니는 15살짜리 막내 해리에게 그 얘기를 꺼내셨다. 왠지 기시감(旣視感)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단 그전과 다른 게 있다면, 예전에는 의논의 상대가 맏아들이었는 데 비해 이제는 그게 막내라는 거였다. 김치사업을 차리려면 전기와 군(郡)에서 공급하는 수돗물이 필요했다. 보건부의 규정이었다.
전기도, 전화도 없는 올라아 집은 물마저 집수(集水)에 의존하는 터라 아예 고려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쉬프먼씨네 도살장이 우리 집에서 불과 0.5마일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또 그 책임자는 우리가 애교로 뚜뚜 맨이라고 부르는 거구의 하와이언이었다. 도살장 건너편에는 예전에 세를 놓아 꽃도매상으로 쓰던 창고가 비어있었다. 또 그 위치가 도살장의 대형 냉장고 바로 맞은쪽이어서 김치공장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뚜뚜 맨이 돌보는 목축장 인근에 김치공장을 차리면 소와 말도 많을뿐더러 하와이 토착민 일손도 많고 해서 아주 이상적이었다. 뚜뚜 맨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억센 거구에 키가 6척인 그는 어디를 보나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처럼 근엄하고 위풍이 당당했다. 그의 딸 마르타(Martha)는 아빠 목장에서 승마를 배웠다. 또 엄마를 닮아서 예쁜데다가 아빠의 귀태를 이어받아 호놀룰루에서 개최되는 Aloha Week 축제에 최초 여왕으로 뽑혀갔다. 그 영예로운 일에는 승마기술이 필수적이었다. <계속>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