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그 뒤로 5년간 우리 집 김치사업은 거의 전적으로 영흥이와 해리, 어머니, 그리고 마음씨 좋은 친구 허버트, 이렇게 넷이 운영했다.
1961년에 영흥이는 집을 떠나 대학에 다니라는 권유를 받았다. 영흥은 캘리포니아의 어느 전자전문학교를 혼자 힘으로 마친 다음 대학과목 몇 개를 수료하고 육군에 입대했다. 영흥에게 군대생활은 물속의 오리격이었다. 유럽지역에 배치된 그는 역사, 박물관, 골동품 등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자기의 시간을 만끽했다.
거기에 가 있는 동안 사진기술도 더 익히고, 현대식 발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구시대의 여러 가지 경이로운 것에 대한 견문을 많이 넓혔다.
<군막사의 영흥이>
영흥이가 떠난 집은 어머니에게 적막했다. 한때는 양부모에 자녀 여덟, 개가 세 마리,
게다가 마이나(mynah) 한 마리까지 끼어서 북적거리던 가정이었건만 이제는 당신과 해리와 굳보이 셋 뿐이었다.
그런 사정을 동정이라도 하려는 듯, 물탱크의 이음매들이 새기 시작하여 큰 방울눈물을 흘렸다. 이사할 때가 온 것이다. 어머니와 해리와 굳보이는 힐로시의 어느 복식(複式)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감정이 착잡했다. 이사 간 곳은 포나하와이 스트리트(Ponahawaii Street)의 맨 꼭대기 지점, 아름다운 힐로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 과도기에 어머니는 쉬프먼씨의 병환이 말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순이 언니와 어머니는 그분을 찾아가 안투리움(anthurium)꽃으로 그의 방을 가득 채워드렸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우리의 집주인이었고 하와이를 대표하는 네네(Nene)새의 보호자이기도 했던 훌륭하신 어른이 떠나시려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를 염려해주고 찾아주시던 분이 이제는 어머니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순이는 그에게 네네새가 살아남게 된 것은 당신의 덕이라고 말을 해주고 영적 내용이 담긴 책 한 권을 드렸다.
그는 어머니의 용기를 높이 샀다. 어머니는 슬픈 얼굴로 쉬프먼씨를 마주 보면서 You, good man이라고 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적어도 한 번은 더 쉬프먼씨를 방문했다. 그 분은 가정의 문장(紋章)을 몸소 실천하신 어른이었다.
김치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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