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스가 넘는 연필을 꺼내 놓고 열심히 깎아 심을 뾰족하게 만들어 키 순서대로 가지런히 필통 속에 넣는다. 내가 연필을 깎기 시작하면 엄마를 비롯한 모든 가족이 내가 학교 갈 준비로 마음을 다지고 있다는 것쯤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연필 깎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매년 새로운 학년에 임하는 나의 의식적인 행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새 학년의 시작을 기다리는 방학이 끝나갈 때쯤 되면 난 늘 마음이 분주해진다. 방학동안 시간의 구속 없이 편히 지내던 몸과 마음이 아침에 일어나 등교를 하고 매 시간 돌아가는 시간표에 따라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숙제를 해야 하니 우선 짜여진 시간에 익숙해지는 것부터가 부담인 것이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스스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어느 땐가부터 연필을 깎는 습관이 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고등학생 때에는 샤프가 연필을 대신하게 되었고 그 때는 샤프심을 5mm짜리나 3mm짜리 등 종이 위에 글씨를 썼을 때 좀 더 글씨가 예뻐 보이는 사이즈의 샤프심을 사서 샤프를 꽉 채워 넣는 것으로 변화가 되었다. 요즘은 노트북 컴퓨터에 새 폴더를 만들고 계획서를 써 넣는 것으로까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방법이 진화되었다.
교수가 된 지금도 난 학생들과 똑같이 마음이 느슨해지는 석달간의 긴 여름방학을 즐기고 이제 곧 새로 시작된 새 학년 새 학기의 학생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 기회가 해마다 있다. 그것은 누구나 맞이하는 신년 새해의 각오와는 다른 것으로 오직 느슨해진 마음에서 빡빡한 스케줄 속으로 묶여야 하는 현실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실질적인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학교와 같이 긴 쉼의 기간이 없이 1년 365일을 매일 숨 가쁘게 사는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의 기회이다.
요즘 신학년 시작을 알리는 Back-to-School 세일이 한창이다. 며칠 전 스테이플스에 가서 초등학생 아들 뒤를 쫓아다니며 아들이 필요하다고 집는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또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부모들의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보았다. 물론 새 학년을 맞이해 필요한 학용품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요즘은 노트북에 MP3 등 고가의 학용품 준비로 신학기를 준비하는 학부모의 허리가 휜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학용품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의 준비인 것이다.
물질 중심의 준비에서 마음의 준비까지 챙겨주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거에 부모 자신이 어떻게 새 학년을 준비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고 그 이야기를 자녀와 나누는 것이 방법이다. 이스라엘의 교육자 포요스테인(Reuven Feuerstein) 박사는 중재교육(Mediated Learning)의 이론으로 아동이 배워야 할 내용을 부모의 경험이나 아동이 공유할 수 있는 내용과 연결시켜 이야기함으로써 학습의 효과가 높아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냥 “열심히 해라” “준비를 잘 해라”라고 학용품만 사줄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의 나이 때 어떻게 준비했고 어떤 것이 도움이 되었는가를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새 학년을 준비하는 마음의 각오가 자녀 자신의 준비가 되도록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도록 개학 1~2주일 전부터 실질적으로 관리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김효선 교수
<칼스테이트 LA 특수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