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의 자비를 간청해 봤지만
그리 될지는 모르겠다
성당 게시판에 늙은 사무장님이 안내문을 붙일 것이고
새벽미사 온 노인들이
하나 둘
나의 연도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나의 영혼이 파란 불을 밝히고
반딧불처럼 여기저기 반짝반짝 다닐 것이다
나의 부음을 듣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빌어주고
제비꽃과 꽃다지가 아련하게 핀 길을
갈 것이다
그 길 양쪽에는 여기처럼
꽃, 별꽃들이 피어있을 것이다
나를 아는 산책길의 나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곧 그의 뿌리를 찾아 스며들 것을
귓속말해주리
모든 경계가 애매하다
이도영 ‘얼마 후’ 전문
시인은 자신이 죽은 이후의 풍경과 조우한다. 성당 게시판에 나붙은 부고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노인들.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던 그의 영혼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이들을 축복하고 길을 떠난다. 제비꽃과 꽃다지로 봐서 길 떠나기 좋은 계절. 흙이 되어 금방 돌아오리란 약속을 나무에게 하는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무와 인간과의 관계가 애매해진다. 자연을 하나로 보는 방법적 인식이다.
한혜영 <시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