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읽은 책장처럼 또 한 해를 넘긴다. 한 해를 보냈다는 것은 내 인생에 배급 받은 시간 중 일년치 365일을 써버렸다는 의미이다.
산다는 것은 시간을 쓰는 일인데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갈수록 느낀다. 세모에 이르면 뼈아픈 후회감에 젖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중에도 언젠가 찾아가 뵈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내 생활에 매달리다 끝내 찾아뵙지 못했던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인사가 숙제로 남아 서둘러 펜을 들어 엽서를 쓰고, 이-메일을 전송하고,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만나서 회포를 푼다. 세모에 눈을 뜨게 되는 인간관계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남의 일에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자선’에 참여하게 되고 떠들썩한 모임을 갖는 것도 세모의 특징이다.
세모의 낭만 어린 기분을 내며 조용한 곳을 찾고 싶어 겨울바다도 볼 겸 레돈도비치의 한 식당에서 지인과 약속을 했다. 여름 인파에 시달렸던 겨울바다는 지금쯤 쓸쓸하리라 생각했었는데, 겨울바다는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쓸쓸해 보이는 것은 모래사장일 뿐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며 위엄에 차있고, 무한한 꿈을 잉태한 크고 큰 바다일 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함께 밥을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여유는 인간관계에 미풍이 감도는 일이다. 그녀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정말 해야 할 일은 그저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라면서 선물을 건네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선물을 풀어보니 손수 짠 예쁜 목도리였다. 선물은 값이 문제가 아니라 성의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선물이었다. 선물은 인간관계의 어쩔 수 없는 인연과 굴레를 재인식시켜 주고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기도 한다.
그날 그녀는 감동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아는 어떤 사람은 연말에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목도리를 손수 100개를 짠다고 한다. 100개의 목도리가 완성되면 응달진 곳에서 춥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그들을 안아준다고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불우한 이웃들에게 따뜻하고 고마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베풂, 선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며칠 전 신문에서는 한 ‘비밀 산타’의 나눔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기사가 큰 감동을 주었다. 미주리 캔사스시티에서 25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은 액수나마 돈을 나눠줬던 ‘비밀 산타’ 래리 스튜어트씨가 최근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다른 익명의 독지가가 이 일을 이어받아 대물림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가 나눠주는 지폐에는 ‘래리 스튜어트, 비밀 산타’ 라는 글이 도장으로 찍혀 있다고 한다.
따뜻한 말, 격려의 인사, 사랑한다는 말은 세모에 훌륭한 선물이 될 수 있다. 연탄재를 우리의 삶에 비유한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극히 짧은 시이나 세모에 우리 모두의 삶을 뒤돌아보게 질문하는 시이다.
저물어가는 세모의 찬바람 속에 부축임이 필요한 사람, 외로움에 떠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생각하며 따뜻한 손을 내밀어 부축해 주는 일, 또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사랑을 표현 하는 것은 가슴을 나누는 일이다. 그런 세밑 사랑으로 세상은 또 힘내어 살만한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김영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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