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 42가 포트 오소리티 역 입구에 위치한 화방 ‘성 포트레이트 페인팅’. 그 앞에는 서너명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진열된 그림들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화가 성기영(74)씨는 2007년 5월, 초상화 전문화방인 성 포트레이트 페인팅을 개점한 이래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사니 눈도 밝아진 것 같다”며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요즘 같은 날은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는 천직이 돼버린 초상화 작업에 대한 자부심과 삶에 대한 만족이 배어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에 빠졌던 그에게 있어 초상화 작업은 생계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를 세계 곳곳으로 인도한 삶의 나침반 같은 존재였다. 1950년 중학교 2학년생이던 그는 미군 부대 앞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팔면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생계를 이어갔다. 베트남 전쟁 중 미군부대에 의해 전문 화가로 고용된 그가 1965년부터 5년간 베트남 전선의 지하 벙커에서 그려준 미군들과 그 가족 및 연인들의 초상화는 하루에만 10여점을 넘겼다. 초상화가 특히 미군들에게 인기를 끌자, 그는 미군 주둔지를 따라 이동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태국, 필리핀, 그리스,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에까지 이르게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그렇게 세계를 떠돌며 모은 돈으로 그는 집을 사고 개인 사업체 역시 운영했다.
그렇게 붓을 놓고 15년간 사업에 몰두했지만, 지난 97년 IMF로 전재산을 잃고 본업이자 천직인 화가의 길로 돌아왔다. 붓과 이젤을 들고 뉴욕으로 온 그는 42가 소재 네일가게 구석에 자리잡고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 붓을 든 첫날 그에게 쏟아진 주문만 3,000여달러에 달했다고. 이후 그는 스태튼 아일랜드 패스마크 매장, 풀튼 스트릿 지하철 역 등지에서 활동했다. 매일 아침 그는 피부톤의 바탕이 되는 9단계의 색깔을 만들며 하루를 시작한다.
“초상작업은 일종의 화장”이라는 그는 “여성의 화장품에서 색 배합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고 말했다. 성씨가 요즘 작업하는 작품 수는 일주일에 서너개 정도. “네델란드인은 작품에 대해 관대하고, 유태인은 주문이 까다로우면서 지불에는 인색하고 여성 손님들은 실물보다 더 곱고 예쁘게 그리면 좋아한다”며 웃는 그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최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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