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법당 내에 모셔져 있는 1000분 지장보살.
연비로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가 없는 법장스님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고 있다.
주지 법장스님, 서예가이자 시인.수필가
연비(불에 태우는 것)로 손가락 2개 없어
‘제행무상시생멸법 생멸멸이적멸위락(諸行無常是生滅法 生滅滅已寂滅爲樂)’ “일체 모든 행은 무상하기에 생멸(生死·생사)하는 법이라 생멸을 이미 넘어서면 적멸(涅槃·열반)하여 즐거움이 됨일세”.
“승려 된 것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다”는 필라 화엄사 주지 법장스님. “승려 된 것이 기쁘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나 하고 지금도 공부 많이 한다”는 법장스님은 16세에 출가 해 법랍(승려 된 나이) 42세가 되었고 세수(세상 나이) 58세다.
승려가 되어 30년이 지나면 ‘종사’라 불리며 50년이 넘으면 ‘대종사’라 불린다는 법장스님은 오른쪽 손가락 둘이 없다. 두 손가락은 연비(불에 태우는 것)를 통해 타버렸기 때문.“나는 승려가 된 뒤 얼마 후부터 서예와 묵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빠지면 아주 푹 빠진다. 많은 사람들이 내 서예와 묵화를 보고 잘한다고 칭찬했다. 정말 내가 보기에도 잘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묵화와 서예가 기교는 보이지만 도(道)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 교만을 떨쳐 버리고 더 깊은 정신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연비하기 일주일 전부터 기도했다.
이때가 20대 초반이었다. 일주일 후 기도 회향 할 때 한 스님을 옆에 두고 연비에 들어갔다. 연비란 촛불을 켜놓고 그 촛불에 손가락을 태우는 것이다. 살덩이가 전부 기름덩어리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두 손가락에 있는 기름덩어리가 한 방울 한 방울 타서 떨어졌다. 1시간 정도 태웠는데 손가락과 손가락뼈가 촛불에 녹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1시간 내 동안 아픔은 못 느꼈다. 그런데 딱 3번 아픔이 찾아 왔다. 이 때 생사(生死)를 오고갔다.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는 괜찮았는데 아픔을 느끼는 순간 온 몸이 타들어가는 듯 다 아팠다”고.
스님은 “온 몸이 떨어져 나가듯 생사를 오고가는 아픔이 닥칠 때 마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행무상시생멸법 생멸멸이적멸위락(諸行無常是生滅法 生滅滅已寂滅爲樂’ ‘일체 모든 행은 무상하기에 생멸(生死·생사)하는 법이라 생멸을 이미 넘어서면 적멸(涅槃·열반)하여 즐거움이 됨일세’라는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모든 아픔이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았다. 이 때 옆에서 연비를 지켜보던 스님이 ‘무섭다’며 도망갔다. 연비 후 병원에 갔더니 3도 이상 화상은 살이 썩기 때문에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손가락 마디를 살리기 위해서는 15일에서 30일을 기다려야 한다 했다. 기다려도 썩으면 그 때는 마디마저도 잘라내야 한다고. 손가락 마디 밑을 자르고 기다렸더니 더 썩어들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 끝 부분에는 근육이식을 했다. 손가락 마디는 살려낸 셈이다”라며 연비할 당시, 생사의 오고감을 회고한다.
스님은 “연비를 하고 나니 주위에서 ‘법장스님이 서예와 묵화 그리고 공부를 잘하니 마귀에게 넘어가 손가락을 태웠다’는 비방 소문이 났다. 이대로 서예와 묵화를 하지 못하고 주저앉으면 영원히 마귀에게 지는 것이라 생각됐다. 그래서 연비 후 한 달이 지난 다음 자동차 한 대에 종이를 가득 싣고 절에 와 문을 걸어 잠근 채 연비한 손가락에 붓을 들고 고무줄로 단단히 잡아 맨 다음에 다시 붓글씨를 처음부터 시작했다. 종이 한 자동차분을 다 쓰고 나니 다시 글씨와 그림을 예전대로 원상 복귀할 수 있었다. 연비 후 29살이 되든 해 첫 서예와 묵화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마귀에게 사로잡혀 연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은 사람’이라고 하며 끈기와 인내로 두 손가락 있을 때보다도 더 서예와 묵화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어려움을 호소해 오는 사람이 있을 때 “생사(生死)를 담보로 한 기도를 해 보았나?”라고 물어본다는 스님. “불교인이든 어느 종교인이든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혼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생사를 넘나드는 기도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스님은 강조한다.일 년에 몇 차례(사월 초파일·10월 세 번째 일요일·동지) ‘스님이 베푼다’는 대대적 행사
를 하고 그 때 수고한 신도들과 노래방을 찾아 함께 노래 부르며 춤도 춘다는 스님은 “승려는 승려 상을 탈피해야 한다. 사회와 승려는 남남이 아니다. 공부한 만큼 신도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오픈 마인드(open mind)가 되어야 한다. ‘나는 승려니까 선택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처음 행자가 되어 수행하는 기간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지를 넘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공부 많이 한다. 절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깨달음을 얻었다 본다. 불교를 확실히 알고 왔으니 깨달은 것이 아닌가. 불성(佛性)은 씨앗이다. 그 씨앗이 줄기가 생기고 잎이 피는 과정은 수행이다. 꽃이피어 향기 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은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탁자 위에 올려놓은 부처는 소용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다. 우리는 깨달음의 존재다. 어떻게 해야 보살행을 할 수 있나. 이웃을 위해 자비를 베풀면 그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에너지를 살려야 한다. 신도들하고 얘기가 통하면 기가 살아난다. 사람들에게 좋은 걸 베풀어야 한다. 신도들이 단 1달러를 내어도 감사한다. 신도들하고 호흡을 맞대고 같이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스님은 “나는 1985년에 미국에 들어왔으나 10년 동안 한국에 6개월 미국에 6개월 하는 식으로 정착을 못하고 방황했다. 방랑 아닌 방랑을 한 것이다. 특히 승려는 미국에 정착이 어렵다. 한국에서는 사미승만 되도 의식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완전 밑바닥 생활인 행자부터 조실노릇까지 다 해야 하는 게 승려들의 생활이다. 1995년 5.3에이커의 땅을 인수해 화엄사를 창건했다. 그 때 이후 2에이커의 잔디밭을 매일 혼자 관리해 오고 있다. 또한 일요법문과 매주 일요일 오후 20여명에게 서예를 가르쳐 오기를 10년 이상 봉사해 오고 있다. 그들은 개신교인, 천주교인, 불교인 등이 같이 배운다”며 이민 와 살고 있는 한인 동포들에게 주는 말로 “이민 와 산다는 것 자체는 불안이다. 문화가 틀리다. 돈이 있어도 내 돈이 아니다. 피난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곳에 이미 이민 왔으니 이곳에다 뼈를 묻을 생각을 해야 한다.
고향이라 생각해야 한다. 마음으로 완전히 정착해야 한다. 또 부부지간에는 나쁜 꼬락서니를 잘 봐주어야 잘 산다. 가족과 친구들의 약점을 보호해 주는 서로 도와가며 사는 동포들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법장스님은 2007년 6월17일 뉴욕 열린공간에서 스님과 함께하는 작가와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뉴욕불교TV(사장 곽현파)가 주관해 2005년 1월15일부터 2007년 6월9일까지 총 120회에 걸쳐 방송으로 나간 서예와 사군자 교실을 통해 수업한 시청자들과 만남의 시간이었다. 약 270여명이 참석했다. 이 때 법장스님은 “뉴욕불교TV 방송에서 실시한 서예교실이 끝난 것은 꿈만 같다. 어려웠던 것은 표정 관리였다. 그런데 서예교실 반응이 너무 좋았다. 개인적으로 방문하거나 뉴욕에서는 단체로 화엄사를 방문하여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어떤 분은 TV 만 보고 작품을 만들어 한국에 출품해 입선된 분도 있다”며 “척박한 이민생활에서의 한인들의 문화와의 만남의 장은 실로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서예가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법장스님은 1963년 법주사에서 혜정스님을 은사로 16세에 출가 해 71년 법보종찰 해인사 강원대교과(13회)를 졸업했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75년 해인사 선원을 시작으로 제방 선원에서 안거했으며 73년부터 79년까지 한국불교 미술전 서도부문 입상, 78년부터 80년까지 전시미술대상전 서도부문 입상, 79년 서울 견지화랑에서 개인전, 81년과 84년 서울 동덕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후 87년 필라델피아 원각사 주지로 부임했다. 이후 88년 뉴욕 상운사를 창립했고 91년 뉴욕한인회관에서 개인전, 91년 필라 공간화랑에서 개인전, 94년 덴버 용화사 주지 부임을 거쳐 95년 필라델피아 화엄사를 창건하여 현재까지 주지로 봉직하고 있다.
화엄사 주지로 봉직하는 동안 스님은 97년 4월 필라 Art of Museum에서 서예(사군자)시범, 97년 5월부터 현재까지 화엄사(215-489-1118)에서 서예 및 사군자 지도, 2004년 11월부터 현재까지 화엄사 한문교실 개원 강좌, 2005년 1월 WYBE(Our Korean Neighbors)출연, 2005년 1월15일부터 2007년 6월9일까지 뉴욕불교TV 방송 서예·사군자 교실 방송강의, 2005년 9월5일부터 10월2일까지 필라 서재필봉사센터에서 개인전 등을 가졌다. 스님은 저서로 각각 108편인 시집 <허공에 서서>, <두 나래를 펴고>와 수필집 <바다를 삼킨 물방울>과 염불 CD <천수경> 등이 있고 불교미술대전에서 7회, 전시대상전에서 3회 입상했고 5회의 개인전시회를 한국과 미국에서 가진바 있다. 화엄사 주소: Hwa Um Buddhist Temple. 10 Layle Lane, New Britain, PA 18901.
<김명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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