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시대가 바뀐 것일까? 경제계에 새로운 원리가 나왔다고 하는 영국 중앙은행 킹 총재의 말은 지금 극도로 혼란한 금융계에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의문의 시작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이다. 서브프라임 문제가 본격화한 지난해 8월 미국의 연방은행을 포함한 대부분 주요 중앙은행들은 갑자기 돈줄이 막힌 대형 은행들에게 구제자금을 공급해 위급한 상황을 넘겼다.
영국의 킹 총재는 예외적으로 긴급 자금수혈을 하지 않았다. 대외명분은 확실했다. 서브프라임에 무분별하게 투자해 손실을 입은 은행을 정부가 구제해 주는 것은 도덕적 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해이 현상이 만연해지면 앞으로 금융계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정부가 구제해 준다고 믿어 더 큰 투기에 빠져들 것이고 그 결과는 언젠가 치명적인 경제공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통보수 경제계는 영국 중앙은행의 결정을 높이 평가했다. 금융계가 서브프라임 같이 무분별한 투기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원칙이 필요하고 그 원칙의 수행은 금융감독 당국이 구제금융을 자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반면 미국과 같이 긴급자금을 공급한 국가들의 주장은 이렇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만약 은행들의 파산으로 연결된다면 전 세계적 금융공황 상태까지 치달을 수 있는데 도덕적 해이를 논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는 것이다.
구제금융 옹호론자들은 도덕적 해이를 용납지 않고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한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진 구제정책 거부가 미국의 대공황과 일본의 장기불황을 초래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당시 미국 연방은행은 은행들의 자금위기를 외면해 대규모 은행도산을 초래했고 일본은 경기불황이 다가오는 데도 인플레를 막는다고 이자율을 올려 녹초가 된 경제에 결정타를 날렸다.
이렇게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에서 시장경제의 원칙에 충실한 정부의 정책이 과연 현실적인지에 대한 논란은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와 그로 인한 금융계의 신용경색의 해결책을 놓고 영국이 다른 선진국과 반대의 정책을 택하면서 실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제 약 6개월이 지난 후 판정은 일단 영국 중앙은행의 패배로 나타났다. 긴급자금을 공급한 국가들의 금융계는 안정이 돼가는 반면 영국은 5대 은행인 노던 록이 정부 관리에 들어가야 할 상태까지 이르고 있어 결국 금융계의 문제에 대한 방치가 금융 불안을 야기하고 그 해결은 정부의 부담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잠정적으로 금융계의 위기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인 파장이 큰 문제는 일단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책임전가론을 따지는 것은 이론적 허세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서처럼 많은 국가들이 국민 경제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위해 금융계를 포함한 대기업을 구제해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장 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다는 미국에서도 최근에만 1998년의 LTCM이라는 헤지펀드를 구제해 줌으로써 당시 불안했던 주식시장을 안정시킨 사례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구제정책은 도덕적 해이가 제기하는 부정적 효과라는 도전에 항상 시달린다. 서브프라임 사태처럼 스스로 일으킨 문제를 정부가 도와준다는 관행이 생기면 금융계는 투기에 대한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투기가 만연케 될 것이다. 이 과정이 몇 번 되풀이 되면 그 때는 정부도 어찌할 수 없는 파국이 와 결국 금융기관도 국민도 다 같이 망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강경론을 펼쳤던 이 시대 유일한 킹 총재마저 자신의 강경론이 영국 금융계와 더 나아가 영국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은 일단 살리고 보자는 것이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운화
커먼웰스 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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