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문화와 가치 배워야
칼로스는 3년 전 엘살바도르에서 이민온 학생이다. 현재 9학년이지만, 같은반 학생들보다 두살이나 나이가 더 많다.
자기 집안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자기가 처음이고, 앞으로 대학까지 진학하는 것이 소원인데, 아직까지 중간을 맴도는 성적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앞으로 훨씬 나은 성적을 얻기 전에는 4년제 대학 진학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이 같은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지난 3년 동안 칼로스의 성적의 흐름을 살펴보니, 초급 ESL로부터 지금까지 더디나마 꾸준한 향상을 보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칼로스, 지금은 네 성적이 중간을 못 넘고 있지만, 지금까지 해 오던 식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너,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가 승리한 얘기 알고 있지?”
잠시 동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더니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무슨 얘기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묵묵부답이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다 아는 얘기를 고등학교 학생이 모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내란과 빈곤의 고약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칼로스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 같은 ‘무지’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칼로스의 ‘무지’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지금 칼로스를 보고 한심해 하는 나 자신도 다른 환경과 다른 조건에서 똑같이 한심한 ‘무지’를 보이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질적인 문화권에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류사회의 문화적인 유산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이민 1세로서는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땅에서 뿌리박고 살아야 할 2세, 3세 젊은이들의 경우는 다르다. 적어도 미국사회의 일급 엘리트들과 함께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미국을 이끌어갈 지도자 그룹에 들어가려면, 이들 엘리트들이 갖추고 있는 수준의 교양과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문화적인 유산에 무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성은 한국에 귀화한 동남아인들의 자손들이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지도자 그룹에 들기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와 가치를 이해해야 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학교 공부 외의 교양과 지식을 쌓는 가장 효과 있는 기간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들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과목 공부하느라고 바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한가하게 교양을 쌓을 시간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부터는 학과 평점 올리고 SAT 점수 잘 받는 것이 급선무로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학교 공부와 학교 공부 바깥의 지식을 쌓는 일이 상호배제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개의 경험은 서로 밀접한 연계성을 가진 지적 활동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 이상의 지식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며, 다양한 방면에서 지식을 쌓은 학생들은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한결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지적 활동의 상승작용을 제대로 활용하면, 미국사회의 지도층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많은 한인 후세들이 참다운 의미의 엘리트가 되어 미국사회에서 주역노릇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칼로스에게는 봄방학 동안 이솝의 우화를 꼭 읽어야 한다는 숙제를 내주었다.
김순진
<밴나이스 고교 카운슬러·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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