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카 알바가 막 무명을 탈피한 시점에서 한 영화잡지 기자가 그녀의 외모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남학생에게 예쁜 여학생을 그려보라고 하자. 아마도 순정만화에나 나오는 얼굴과 몸매의 여자를 그릴 것이다.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예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시카 알바를 만나보기 바란다.” 일반인들에게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한인 예술가 부부의 삶을 묘사해보라고 하자. “뉴욕이나 파리 등 세계적인 문화 중심지에서 활동할 것. 소호나 그리니치 빌리지에 스튜디오가 있을 것.
한국에도 한적한 산골쯤에 작업실이 있어서 양쪽을 오가며 생활한다면 금상첨화. 자식, 부모, 친구 등 일반인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늘 둘이서 오붓한 여행을 다닐 것.”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이 주변에 어디 있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은 서양화가 김차섭, 김명희 부부를 만나보기 바란다. 늦가을과 겨울철에는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만날 수 있고, 봄과 여름철에는 강원도 내평리의 폐교를 개조한 적적하지만 분위기 있는 작업실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이들 부부와 차 한잔을 마시며 대화하다 보면 “역시 예술가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은 다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좋다와 나쁘다, 혹은 바람직하다와 아니다
라는 경계가 그어지는 다름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다름이다.
특히 눌변이라고 알려진 김차섭 화백의 ‘달변’을 듣고 있으면 이 화가가 딛고 있는 땅은 세상 어디쯤인지 궁금해진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살면 안 돼. 삶이 계획대로 되나? 그리고 계획대로 되면 또 재미없지. 그 다음은 뭐 할거야?”그렇게 뜬 구름 잡는 식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스튜디오 내에 있는 그림들보다는 책상에 놓여진 ‘주역해석’이나 별자리 관련 책들에 더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서울대 미대 선후배 사이였던 두 사람은 이화여고 미술 교사로 다시 인연을 맺었다. 김차섭씨가 76년 라커펠러 재단 펠로우쉽으로 프랫대학에 온 후 김명희씨도 곧 같은 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왔고 자연스럽게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식장은 뉴욕시청이었고 신혼집은 프랫대학 기숙사였다. 대부분의 유학생 부부들처럼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김차섭씨는 생활 전선으로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신 아내 김씨가 초창기 한국일보사에서 광고담당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편은 벽에 삼각형을 그려놓고 멍하니 참선하고 있었다. 한 3년을 그랬다.
잔소리를 거의 안하는 김명희씨가 “무슨 삼각형을 3년이나 그리냐”고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려진 삼각형에 한 귀퉁이를 트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러나 김차섭씨에겐 ‘예술가로서의 숨통이 트이는’ 시간 치곤 3년이란 시간이 길지 않았다. 도를 깨닫는 데 평생도 걸리지 않던가. 김씨는 “유학 온 지 얼마 안 돼 모마에 그림을 전시할 정도로 빨리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남은 작품 활동이 부담스럽고 힘들었다”며 “그렇게 숨이 트이고 나니 그제야 뭔가 보이는 게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 과정을 다음가 같이 해석했다. “70년대 김차섭은 자갈밭 페인팅, 드로잉, 에칭 등으로 꽤 이름을 날렸지만 어떤 면에서 그의 작품은 서구인이 갖고 있는 동양적 예술관이라는 상투적 관점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도 자기의 작품에 대하여 꼭 같은 것을 느끼고서, 드디어 1980년대 초에 그 ‘틀’을 깨고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아내가 옷가게로 돈을 모으고 소호에 아파트를 장만하는 등 비교적 수월하게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후 김씨의 작품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반면 아내 김씨의 작품 세계는 90년대 강원도 작업실을 만든 후 풍성해졌다. 이들이 지금은 드라마나 영화 혹은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시골초등학교 개조 작업실’의 원조인 셈이다. 교실마다 걸려있는 칠판에 우연히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이후 김씨 작품에 주요 모티브가 됐다. 남편의 표현대로라면 아내도 이때 “작품에 대한 숨통이 트인 것”이다. 이후로 이들은 강원도와 뉴욕을 오가며 그림 그리고 여행하며 재밌게 살고 있다. 이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와 평론가들의 몫이다. 다만 김씨
부부가 지금처럼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깨지 않는 삶의 모습을 유지하기 바란다.
<박원영 기자>wypark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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