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자기 몸집만한 핑크색 여행용 가방과 두툼한 슬리핑백을 현관에 가지런히 세워두고 곤히 잠이 들어 있다. 저녁 내내 준비물을 적은 종이를 여러 번 확인해 가며 친구들과 가는 일주일의 여행에 들떠 있더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보수적인 아빠 때문에 제대로 된 슬립오버 파티조차 해보지 못한 딸아이는 중학생이 된 후, 학교에서 수업의 연장으로 실시하는 ‘아웃도어 스쿨’, 즉 일종의 수학여행인 이번 여행을 몇 달 전부터 무척 기다리는 눈치였다. 딸아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는 공식적인 첫 외박인 셈이다.
아이가 집을 비운 동안 밀려있던 집 안 일들을 말끔하게 해치울 요량이었는데, 막상 딸아이를 태운 파란색 스쿨버스가 떠나고 나니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 것이었다.
빈 방을 보면서, 대학 간 자녀들이 곁을 떠난 뒤 한동안 무얼 할 지 몰랐다던 선배 엄마들의 푸념들이 이해가 되었다. 자녀들이 떠난 뒤 생긴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를 새로운 인생의 기점으로 삼고 다시 분주해 지기 시작하는 선배 엄마들의 모습들이 딸아이의 짧은 여행을 계기로 내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교육자인 도로시 피셔는 “어머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댈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했다. 아이가 집을 떠나고 난 후 애완동물에게나 헛헛한 마음을 쏟고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딸아이의 여행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천경주/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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