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마더 테레사는 우리 가족 중에서 애정이 결핍되고 버림받은 식구들이 있으면 먼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다.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번 봄에 우리 형제들은 91세이신 어머니의 탈장수술을 계기로 다시 어머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사순절 기간인 2월 중순부터 탈항이 되어 대소변을 제대로 못 보고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전문의를 찾아가 수술 날짜를 받고, 그때까지 열흘 동안 돌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자주 탈항이 되어 그때마다 나는 아파서 괴로워하시는 어머니의 항문을 물로 씻겨 드리고 자리에 눕히고 손에 장갑을 끼고 젤을 발라 항문을 다시 몸 안으로 넣어드려야 했다. 수술 이틀 전날 멀리 사는 막내 동생이 와서 수술 후까지 2주일 가까이 나와 같이 있으면서 어머니를 함께 돌보았다.
담당 전문의는 실력 있고 친절한 분이라, 우리 집에 자주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를 지시해 주셨고, 우리는 수술 전날 장을 깨끗이 하기 위해 밤중 내내 어머니에게 설사를 시키고 그 뒤처리를 했다. 대장을 많이 잘라낸 수술은 다행히 성공리에 끝났고, 어머니는 전신마취에서 금방 깨어나 우리를 알아보고 얘기를 하셨다. 의사의 배려로 위티어의 좋은 병원에서 그곳 간호진의 친절한 봉사로 회복이 잘 되었다.
그러나 동생은 계속 밤잠을 못 자고 어머니 돌보기를 도맡아 했고, 나도 수술 후 사흘을 병원에서 살았다. 나의 걱정은 어머니가 수술 후에도 대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시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24시간 누군가가 옆에서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어머니를 양로병원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웠다. 어머니를 양로병원에 보내지 않으려고 우리 4형제는 고심했다.
경과가 좋아 의사의 격려 아래 퇴원을 하셨지만 어머니는 쾌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항문과 직장을 잘라낸 상태이므로, 수술 후 3개월간은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했다.
동생이 어머니 곁에서 잠을 못자고 돌보았다. 식사 준비도 문제였다. 수술 후 장에 부담을 안 주면서 영양이 있는 음식을 잡숫게 해야 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식사량을 줄이고, 자주 음식을 나눠서 드렸다. 집에 와서 자식들의 간호를 받으니 어머니는 매일 상태가 좋아지셨다.
드디어 동생은 집에 돌아가고, 다시 내가 어머니를 돌보았다. 이제 나는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지만 성당에 못 간지가 한 달이 되고, 세끼 식사준비 때문에 발이 묶이어 다른 아무런 외부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수술 후 20일이 지나 의사에게 가니, 회복이 잘 되고 있다고 하여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차츰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만 한 달 이상 어머니 간병에 지쳐 있어서, 다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석 달이 가기 전에 어머니가 안정될 것은 확실해져서, 우리 형제들은 안도했다.
우리의 사랑과 희생이 어머니를 살린 것이었다. 우리는 축복 받은 봄을 맞아서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이연행 불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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