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건국 60년을 맞는 이 시점에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중학교 교과서에 삽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0년대에 벌써 일본에서는 독도와 가장 가까운 시네마현에 독도에 관한 동아리모임 12개가 있었다. 당시 우리에겐 부산 수산대학교 교수 한분이 일부 자료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책은 무엇인가.
오늘날 팽창된 한인사회에서 대한인국민(총)회가 한국의 건국에 무슨 역할을 했는가를 묻는 분들이 적지 않다. 흔히 한국의 법통을 상해임시정부에서 찾는다.
그 임시정부는 누가 세웠고, 운영했던가. 그것은 미주 한인사회의 힘이었다.
1908년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미국 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싹트게 만들었다. 이들을 구명운동하기 위해 당시 한인사회의 양대 조직인 공립협회(S.F)와 합성협회(하와이)가 통합해 대한인국민총회를 창립했다. 그것이 1909년 2월 1일이었다.
대한인국민총회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개월 만에 총회장의 자격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을 파견했고, 이에 대한 물적 지원은 모두 이곳 동포들이 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건국은 당시 이곳 선조들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대한인국민회가 그 중심역할을 했던 것이다.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는 2차 대전 중 일본인과 구분하는 신분증을 발급했고, 무비자 유학생을 위해 신원을 보증하는 등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종의 망명정부의 역할을 했다. 국민회의 회원증은 고위 공직자에게 주는 임명장에 버금갔다.
대한인국민총회는 미국을 비롯해 멕시코 쿠바 연해주 중국 등 10인 이상이면 지부를 창립할 수 있었고, 100여개의 지부에 4,000여명에 달하는 범세계적인 조직이기도 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오는 25일·30일 LA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정부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미주지역 독립유공자 94인의 사진과 유물로 그들의 ‘삶과 꿈’이라는 주제의 건국 60주년 기념 전시회를 갖는다. 유공자 개개인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모으고 동영상을 같이 엮었다. 그리고 건국이후의 성장과정까지 접목해 100년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준비하는 동안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그 중 12인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과 한국정부가 선정한 독립유공자 총 8,800여명 중 미주지역의 94인은 너무 적은 숫자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가족이 없었고, 역사가 오랫동안 왜곡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결과이다. 여기서 자신을 위해서는 장례비만 남기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살아온 선배들의 삶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이창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총무이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