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어머니는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로 무척이나 가난한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시집 와서 보니 정말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더라. 너거 아부지는…” 순진한 나를 속이다시피 해서 데리고 왔다며 오십년 전을 돌아보셨다.
시집오자마자 어머니는 들로 산으로 쑥과 나물을 캐러 다니시며 밥 굶기를 밥 먹듯 하셨고 수확이 끝난 밭에 떨어진 배춧잎을 주우러 다니셨다. 항상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집에 와서 고생하는 며느리가 불쌍했지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해 늘 미안했던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니도 언젠가는 쌀밥 한번 배불리 묵을 날이 꼭 올 끼다”라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그 후 할아버지는 그리도 원하셨던 쌀밥 배불리 먹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면서 사셨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대단치도 않은 쌀밥을 먹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배를 주렸던 어머니에게 쌀밥은 어려웠던 시간들 가운데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삶의 희망이었다. 분명 희망이라는 것만큼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희망을 갖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고난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보고 듣지만 그런 것들은 다 남들의 이야기고 정작 자신의 처한 상황 앞에선 쉽게 희망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 가득 찬 낙담을 밀어내고 희망을 채우기가 너무 힘이 든다. 보이지도 않는 희망을 억지로 가지려 하는 것은 피곤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현실도피 일 수도 있다.
그럭저럭 살아온 평생인데 지금 와서 굳이 무슨 희망이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다.
어려운 환경에서 희망을 갖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갖은 희망을 잘 지켜내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희망은 상황에 의해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의해 쉽게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그것도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로 인해서 말이다.
우리들은 유기농이니 자연산이니 하면서 가려가며 입에 넣지만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는 온갖 독한 것들이 다 섞여 있다. 부모들이 화가 나서 한 말들로 인해 그리고 친했던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큰 절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정말 많다. “너 까짓 것이” “그러니깐 너는” “네가 무슨 수로” 등의 말들은 희망의 싹을 뿌리째 뽑는 말이다. 특히 말을 잘 듣거나 안 듣거나 간에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말은 여전히 영향력이 크며 반항하는 아이 일수록 부모로부터의 희망을 주는 말을 더 원한다는 통계가 있다. 희망을 주는 말 한 마디가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 가까스로 세운 희망을 뭉개 버릴 수도 있다.
어린 나이로 이제 갓 시집온 어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그 말을 했을 터지만 어머니에겐 오랫동안 삶의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오래오래 고맙게 기억되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좋은 날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려울 때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원대하지는 않더라도 지푸라기의 희망은 우리의 삶을 강하게 만든다. 쌀밥 한번 배부르게 먹는 것이 뭐 대단한 희망이랴 만은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 그 작은 희망은 어머니 삶을 더 강하게 그리고 덜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 고단한 삶이 너무 무거울 때 “너도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자신에게 희망을 주기 바란다. 확신 하건대 그 “언젠가”가 한결 빨리 찾아올 것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우리 어머니 말씀이셨다.
홍영권
(USC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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