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에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고향에서 온 한 여자분이 나를 만나보기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 가보자고 하여 따라 나섰다. 그 당시에는 38선을 넘어 친지들 소식을 전해주는 일이 가끔 있었기에 행여나 하고 가보았는데 그곳에는 서울대 미술과 학생이라며 처음 보는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다짜고짜 “국대안 반대운동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따지듯 질문을 던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저는 사립학교 학생이에요. 남의 학교 일까지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한 입장도 아니고요. 38 따라지 고학생이거든요” 잘라 말하고는 방안을 휘 둘러보니 저쪽 벽에 여인의 상반신을 그린 6호F 한 점이 붙어있는데 영 아니올시다로 보여 “미술과 학생이면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고 있을 일이지 ‘국대안 반대’ 어쩌구 하며 남의 학교 학생까지 끌어들이려고, 나는 우리 학교를 대표할 학생도 아닌데…” 기숙사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돕고 있던 나는 비교적 얼굴이 팔려져 있어서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하였다.
서울대학은 다들 알다시피 해방전 ‘경성제국대학’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일본인 학생들은 다 돌아가고 한국학생은 불과 몇 명이 되지 않아 당시 정부에서는 공립 고등교육기관이었던 법정전문학교, 고등공업, 고등상업 등을 흡수하여 ‘국립서울대학교’라는 명칭의 종합대학을 세웠다. 불만이 나온 것은 구 제국대학 이름이 붙은 교사에 입학을 한 학생들이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은 다 같은 해에 입학을 했는데 원서를 이쪽에 넣었느냐, 저쪽에 넣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저네들은 제국대학의 건물에 들어왔다고 해서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유치하고, 더욱 웃기는 것은 해방이 되고 1년 후에 생긴 미술과 학생까지 끼어들어 난리를 치며 신촌 구석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나를 불러내고, 도대체 제정신들이 아닌 듯 하였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나는 지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 학생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서양화 전공이었던 그는 국대안 반대운동에 적극 나섰다가 그냥 그 길로 이념운동으로 들어서게 되어 아마 6.25때 북으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서울대학 미술과 제1회 졸업예정자(1950년) 중에서 국대안 반대운동에 휩쓸려 제 때에 졸업을 못한 학생이 여러 명 있는 것으로 아는데 늦게라도 졸업을 하고 훌륭한 미술가들이 되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실력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사라지고 만 2, 3명의 이름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아까운 인재들이었기에…
국대안 반대와는 관계없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북으로 간 화가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서울대 미술과에서 가르치던 길진섭 선생, 성북회화연구소의 이쾌대 소장, 김만형씨 등의 작품이 눈에 떠오른다. 일관 이석호, 청전 선생의 장남 이근영, 정종여씨 등의 모습도 확실히 기억하며 얼마전 그 분들의 작품세계를 소품으로나마 엿볼 기회가 있어 북에 가서도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국대안 반대운동 그룹은 그대로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왜? 모르겠다.
지내놓고 보니 졸업을 했다거나 어떤 그림을 그린다던가 하는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데 명예라던가 이념 따위를 떠나 내가 아직까지 계속 놓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린다’는 이 작업이 너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생스럽고 끝도 없는데 말이다.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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