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아들아이가 24세가 되었다. 을축년에 태어난 소띠 아들이다. 85년 미국에 오던 해 10월에 아이를 낳았으니, 아들의 나이는 곧 우리 집 이민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띠여서 그런지 아들아이는 매사 소걸음에 만만디이다. 별로 맘에 안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 아빠의 회사 일을 돕는 지 1년이 넘었으나, 마치 임시직원 같은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니는 듯하다. 일은 뒷전이고 점심은 뭘 먹을까와 퇴근 후 운동하는 시간만을 잘 챙긴다. 사무실에 있는 동안엔 컴퓨터를 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니, 놀이터를 제공하면서 월급을 주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종종 든다.
우리 세대와는 달리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뭐든 치열하지가 않고 심각하지도 않다. 집에서는 디비디 게임기를 끼고 살며, 늦게 자고 아침엔 늦게 일어나서 굼뜨게 샤워한다. 아침 인간형인 나는 속이 터진다. 그나마 관심이 있는 건 요리이다. 요리 채널을 열심히 보고 쿠키도 잘 만든다. 빨래도 분류해서 잘 한다. 그러고 보니 주부의 역할에 더 적응을 잘하고 흥미를 가지는 듯 보인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용감 씩씩한 사내 쪽은 아닌 것이다. 아들에게 일찍 결혼할 것을 권해 보았다. 가정을 가지면 소걸음도 빨라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너무 빨라요. 아직 스물네 살밖에 안 됐는데요?” 한다.
남편과 나는 스물넷에 결혼했다. 그때 양가에서 모두 이르다고 반대했다.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 좋았느냐는 아직 말하지 못한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차에 피차 염장 지를 일은 없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장장 3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아이에게 결혼을 권하고 있으니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며 산 셈이다. 보통의 삶은 살지 않았나 싶다.
반백년 넘게 살아보니 새해가 되었다고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해여도 작년과 같은 해가 뜨고 인간이 만들어낸 달력이 한 장 넘어갈 뿐이었다. 그러니 갈수록 새로운 게 아니고 점점 심드렁해지는 게 세월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나의 세월이 아니라 아이의 세월을 보게 된다. 가는 세월을 보는 게 아니라 아이의 앞에 펼쳐질 세월을 미리 꿈꾸게 된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느라 이민 1세인 우리 세대는 느리고도 힘들었다. 한걸음 나가고 때론 뒷걸음질도 하여서 어떤 땐 퇴보이기도 하고 제자리걸음인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소걸음 우보(牛步)이었어도 쉬지 않았다. 걷고 또 걸었다. 우보(又步)였다.
소는 농경시대엔 농사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짐승으로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황소고집’이니 ‘소귀에 경 읽기’니 하여 고집스러움을 대변하기도 하나 정직하고 성실함으로 묘사되는 우리 민족에겐 친근한 동물이다. 사실 느린 소걸음도 고전이나 동양화에서는 여유로움과 평화의 상징으로 표현되지 않는가 말이다. 다만 스피디한 사이버 시대에 소걸음을 걷는 소띠아들이 뒤처질까보아 어미의 마음으로 조바심을 내는 것인지 모른다.
올해는 총체적인 불경기의 여파로 소걸음을 걷기 싫어도 안 걸을 수 없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젠 슬로우슬로우 가련다. 젊은 세대는 부모대신 퀵퀵 템포를 밟아 주었으면 좋겠다. 소걸음이어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걸 체험하게 되길 바란다. 걷다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날’의 행운도 드물게 있기를 기원한다. 은근과 끈기가 부족한 소띠 아들에게 아니 모든 젊은이에게 들려주고픈 기축년 소띠해의 덕담이다.
“소걸음 우보, 또 걸음 우보!”
이정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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