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동안 움츠리고 있던 삼라만상이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켜는 이즈음. 봄은 아주 가까이에 와 있음이 분명하다. 바람이 쌀쌀하지만 봄기운은 나뭇가지 끝에 싹눈을 틔우고, 땅속을 헤치고 쏘옥 얼굴을 내민 연초록들이 역력히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 40여 년 만에 특별한 반가운 분을 만났다. 교회 친교실에서 우연히 옆에 계시던 분이 “혹시 서울 상도동에 살지 않았어요?” 묻는다. 순간 낯설긴 했지만 혹시나 하면서 어렴풋이 돌범 엄마가 아닐까 하면서, 돌범 엄마? 했는데…. 어쩜 40여 년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이렇게 쉽게 같은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인연인가.
순간 난 20대의 소녀티를 갓 벗어난 한없이 젊었던 그 시절로 가본다. 아버지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우리가족에게 꼭 맞는 아담한 양옥집을 지어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는데 그만 사업의 부진으로 복덕방에 집을 내놓게 되었고 새 주인으로 집을 계약한 분이 바로 돌범 엄마였다.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정든 집이 남의 집이 되고 떠날 생각을 하니 너무나 속상해 방안에 들어앉아 철없이 몇 날을 울었던 아련한 추억이 있다. 그때 부모님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난 그 생각까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로 남는다.
이사한 후 돌범 엄마와 우리가족은 각별하게 지냈다. 어느 날 돌범 엄마의 중매로 맞선을 보고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딱지(?)를 놓았던 에피소드며, 지나쳐간 세월 속에 풍덩 빠져 수없이 많은 이야기꽃을 피우고 또 피웠다. 한창 감상적이고 예민한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실패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내일을 알 수 없이 살아야하는 날들. 그래도 희망 잃지 않고 긍정적 사고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때 난 그 무력함을 달래기 위해 책읽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지성과 감성의 갈증을 승화하며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하는 독서는 알고자하는 욕구와 느끼고자하는 욕구에서 이루어지는 것. 가보지 못한 세계, 그리고 보이지 않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한 독서는 높이 오르는 날개를 우리에게 달아주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 생각게 한 시간이었기에 고마워한다.
먹물처럼 까맣던 물빛이 크림 몇 방울을 떨구니 이내 뽀얗게 변했다. 싱크대에 기대어 서서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버린 세월에서 돌아보니 미국생활 37년 가까이 흘렀다. 크게 돈을 벌어 성공했다던가, 내 자신 큰 명예를 이룩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이 순간까지 앞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떳떳함만이 있다.
이제 오는 4월5일이면 나의 첫 수필집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합창) 출판기념회를 갖게 된다. 한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는 준비를 하면서 때맞춰 어려웠던 시기의 추억을 되집어 보게 된 돌범 엄마와의 만남이 기쁨이요, 잃어버린 동기간을 찾은 듯 흥분에 들떠있다. 이젠 어릴 때 무척 개구쟁이였던 돌범, 나이 40이 훨씬 넘은 한 가정을 이룬 가장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이 언제일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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