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환을 걱정했던 새벽촬영 후 눈치 섞인 아침식사를 마치니 우리의 내비게이터가 오늘의 촬영일정을 소개한다. 남해 일주다.
그 첫 번째 방문지는 독일 마을. 펜션 ‘남해 이야기’에서 불과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조성된 특별마을이다. 1960~70년대 독일로 외화를 벌기 위해 젊은 나이에 취업 나갔던 분들이 이제는 육순이 훨씬 넘은 노인들로 변했고,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에 타국에서 고생한 공로를 위로하기 위해 정부에서 특별한 단지를 조성하여 분양하여 주는 곳이다.
얼마만큼의 혜택이 제공되는지는 모르지만 내국인은 이곳에서 살 수 없고 부동산 취득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특별한 혜택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나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정부의 이 같은 배려가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고국을 떠나 살면서 나이 들면 귀국 생각을 한 번쯤 해보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미국마을도 생길 예정이라는데 어떤 사람들이 혜택의 대상일까 궁금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독일마을이란 이름에 걸맞게 유럽풍의 집들이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그림같이 모여 있었다. 마침 가을이 깊숙이 찾아와 코스모스와 들꽃이 어우러진 동네의 모습은 어느 유럽의 작은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들은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각자 흩어져 각자의 느낌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앉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며 촬영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누가 뒤에서 등을 두드리며 부른다. 돌아보니 낯선 할머니 한 분이 관공서 일을 보는데 증명사진이 필요하시다며 사진 한 장 찍어주면 안 되겠느냐고 어렵사리 부탁하신다. 귀국한지 오래 되지 않아 아직 모든 게 익숙하지 않고, 차가 없어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사진을 찍으러 나가려고 생각 중인데, 웬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많이 보여 묘안이 떠올랐고, 가만히 살펴보니 수염 기른 사람 카메라가 제일 커 보여 조용히 따라 오셨단다.
하기야 1Ds 카메라에 70~200mm 렌즈를 장착하고 있었으니 할머니 눈에는 대포로 보여지는 게 당연했으리라. 큰 카메라를 소지한 죄로 영락없는 초상화 사진 봉사에 픽업 되었다. 아침 햇살은 이미 정오를 향해 가고 있어 직광이 심하여 인물사진의 조건은 아니다. 여기 저기 그늘진 곳을 찾는 짧은 시간 동안 할머니는 젊은 시절 못 다한 우리말을 다 쏟아내기라도 하듯 쉴 새 없이 말씀하신다.
뒤 배경이 비교적 깨끗한 오픈 셰이드(open shade: 건물 등으로 가리어진 그늘이지만 주변 빛이 환하게 반사되어 실외에서의 인물사진에 적합한 그늘)에 그녀를 세우고 앵글을 맞추는데 까까머리 시절 한번 외워봤던 미당의 시 한 구절이 낡은 흑백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이 시를 외웠던 시절 이후 신기하게도 처음 생각나는 아주 먼 기억 속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누님 같은 국화꽃을 보았지만, 나는 이 순간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국화꽃 같은 우리들의 어머니와 누님의 모습을 보았다. “웃으세요” 주문에 만드는 미소 속으로 보이는 쓸쓸함과 한쪽으로 약간 처진 어깨선을 보며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 내내 고맙다는 말과 내 나라에 오니 그래도 좋다는 말로 작은 감동을 준다. 미국에서 왔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사진 받을 걱정에 금방 실망스런 표정으로 변하던 주름살 속의 순수한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 사진은 우리의 내비게이터를 통해 잘 전달되었고, 사진 속에서 정지시킨 시간까지 전달되어 그 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건강한 독일마을의 즐거운 여생이 되었으면 기원해 본다.
이번 고국방문 출사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컷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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