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1896 ~1949)의 타계 60주년에 즈음해 나혜석의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쓴 나혜석 이야기 ‘그땐 그 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해누리 펴냄)가 출간됐다.
서울대 법대 교수와 캘리포니아 웨스턴 법대 교수 등을 지낸 뒤 은퇴하고 현재 샌디에고에 살고 있는 김 전 교수는 “고백하건대 나는 생모가 나혜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면서 “젊어서 펄펄 뛰게 미워했던 사람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별러왔던 사람이,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덜 미워지고 혹은 가물거릴망정 용서의 가능성이 부여되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혜석은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 조선미술전에 5회 특선, 1921년 첫 개인전, 1926년 파리에서 그린 ‘정원화’가 도쿄에서 개최된 ‘니카덴’에 입선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였으며, 문필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파리 체류 중 천도교 교령 최린(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과의 염문이 있었고 나중에 최린을 정조 유린죄로 고소한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남편과 이혼하고 유랑하다가 한때 수도생활을 했지만 1949년에 행려병자로 객사했다.
기존의 나혜석 관련 책들이 그의 작품이나 자유로운 여성 나혜석에 주목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나혜석의 뒤에 가려져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남편 김우영과 어머니를 평생 원망하며 살아야 했던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만 네 살 때 부모의 이혼을 겪은 저자는 이후 숙부의 집에서 숙부와 숙모를 친부모로 알고 자랐다. 저자가 다시 어머니를 만난 것은 10년 후. 그가 다니던 대전중학교 복도에 불쑥 나타난 남루한 옷차림의 늙은 여인은 “내가 네 어미다”라는 말과 눈물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후 나혜석은 다시 아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아버지 김우영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혼 이후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잃어갔다. 변호사였던 그에게 변호 수임은 완전히 끊겼고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반갑지 않은 눈길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김우영은 1957년 회고록을 냈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을 나혜석의 이름은 회고록에 등장하지 않는다.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나혜석이 죽은 뒤 만년에 나혜석과 절친했던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 스님을 만나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혜석이 자식을 위해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던 모습과 자식을 만나고 싶어 몸부림치던 모습을 전해들은 아들은 한바탕 눈물을 흘렸고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나혜석의 비참한 말년을 상상하며 가슴 아파한다.이연택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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