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엄마가 흥분되어 음성이 높아진 채 전화를 하셨다.
“갑자기 오늘 하루 종일 아버지가 말을 안 해! 표정도 없고, 불러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대답이 없어!”라고 하셨다.
나는 급히 친분 있는 의사 선생님들의 조언을 받아 아버지를 응급실로 모셔 드리게 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였다.
MRI 결과를 보니, 동맥이 터진 내출혈로 아버지의 왼쪽 뇌 윗부분에 고여 있는 직경 4~5cm 크기의 혈액에 뇌가 눌려 부어 있는 상태인데 “앞으로의 사흘간이 생사에 중요하니 계속 신경을 써 지켜봐야겠어요”라는 신경내과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감사하게도 아버지의 상태는 다음날부터 조금씩 회복되었다. 어느 순간 문득, 아버지가 엄마를 찾으시기에 아버지의 손에다 엄마의 손을 잡아드렸더니 그 손을 뿌리치며 빼내었다. 그러더니 곁에 섰던 새 언니의 손이 잡히자 ‘엄마!’하고 반갑게 부르면서 안기시는 게 아닌가! 아이쿠! 젊은 여자에게 엄마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시간세계는 영락없는 초등생 이전의 어린 아기였다. 그러나 그 짧은 며칠 동안 아버지의 의식세계는 어린 시절에서부터 급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기억상실증 환자에게처럼 나의 존재는 아버지의 기억에 들어 있지 않은 타인에 불과하였다. 어떻게 그런 아버지의 기억을 깨워드릴 수 있을까 고심하던 나는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께 노래를 불러드리기로 하였다. 내가 꼬마일 때 아버지가 내게 불러주시던 동요와 각 나라의 민요들, 그리고 가곡과 찬송가들을.
그 멜로디들을 자그맣게 불러 드리면 아버지는 어느덧 나를 따라 발로 템포를 맞추기도 하시고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향해 지휘를 하며 분명치 않은 가사를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서 노래를 할 때면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노래의 중간 중간에 객석에서 들리곤 하였다. 그 때문에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기침소리는 내 노래의 반주가 되어버렸다. 아마 나보다 아버지가 더 긴장하신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그 기침소리는 ‘딸아, 내가 여기 있다, 노래 잘 하거라!’ 하며 말없이 보내는 ‘싸인’인 동시에, 무대에 선 나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교감의 순간이었다.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하게 된 것도, 어릴 때 아버지의 노래를 들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영향이 된 것 같다. 아버지가 내게 불러주셨던 노래들, 내가 따라 부르던 그 노래들이 이제 내 아버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현재의 시간세계로 생각이 돌아오신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엄마가 아닌 우리 엄마의 손을 찾고 계신다. 화려하게 장식된 선율로 아름답게 들려오는 연주도 감동을 안겨 주지만, 때론 따라 부르기 쉽고 단순한 노래들이 이렇듯 가슴에 더 깊이 심겨지는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심겼던 단순한 선율들이 이렇게 힘 있는 아름다움이요 감동일 줄은…. 두 분의 손을 꼭 쥐어 드린다.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
이메일 sopyh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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