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 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도종환 (1954~) ‘바이올린 켜는 여자’ 전문
남자라면 꿈꾸어 볼만하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의 턱 사이에 쏙 들어갈 정도로 맞춤형인 남자. 왼팔로 들어도 가뿐하게 들릴 정도이니, 남자라는 권위의식이나 중압감 또한 있을 리 없다. 여자가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온전하게 자신을 내맡기겠다는 남자다. 대가라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이면 족하다는.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다고 하는 남자는 물욕도 없다.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런 악기들이 외롭게 방치되고 있지나 않는지 한번쯤은 돌아볼 일이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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