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이구아나다
10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등나무 숲
미끄럼틀이 밀어낸 아이가 말려 들어간다
발끝에 시달리던 빨간 공이 밟혀 들어가고
뒷골목 그늘을 씹던 도둑고양이도 빨려 들어간다
우툴두툴 잔비늘 세우는 이구아나는 잡식성이다
삼킨 먹이들 통통히 살쪄 걸어 나온다
이구아나 배 속에서 알을 꺼내고
감쪽같이 꿰매 놓는다는 인디오들처럼
등나무가 보듬는 그늘은
훔쳐도 다시 자라는 이구아나 알이다
얼기설기 꿰매어진 배 어루만지는 넝쿨
알을 찾는 것인지
세상 온갖 것들 다 품어 보고 있다
빳빳한 햇살이
미끄럼틀 핥고 내려오는 동안
입 냄새 지독한 허공 밀어내며
몸만 들썩이는 이구아나
저녁이 오면 버려지는 저 그늘은
누군가 깨뜨려 먹고 간
노란 알껍질이다
천수호 ‘그늘’ 전문
아파트 놀이터 앞에는 등나무넝쿨이 우거져 있고, 시인은 10층 꼭대기서 그곳을 내려다본다. 미끄럼틀서 쪼르르 미끄러져 내려온 아이가 등나무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공도, 고양이도 빨려 들어가고… 등나무를 이구아나로 바꾸었을 뿐인데 모두가 먹히는, 시적 상상력은 즐거운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삼킨 먹이들이 통통하게 살이 쪄서 나오는가 하면, 알을 꺼낸 뒤 이구아나의 배를 봉합하는 인디오 등등이 출현을 하고 있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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