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처음 마실 때 코르크 마개를 딸지 몰라 애를 먹은 일이 있다
촌놈 주제에 아내 앞에서 분위기 좀 잡으려다 식은땀을 흘린,
그때 뽑다 만 코르크 마개가 저 굴참나무다
얼마나 단단히 박아놓았는지 지난밤 태풍도 끙끙 힘만 쓰다 지나갔다
뽑혀나가지 않으려 땅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버틴 나무들
살짝 들려 있는 뿌리를 따라 땅거죽도 얼마쯤 불쑥 잡아당겨져 있다
펑 따면 꽉 틀어막은 구멍 너머로 몇 백 년 묵은 술 향기 같은 것이 올라올 것 같은데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 치는 시간을 대지는 향그러운 알코올 속으로 끌어들였던 것
온 들판이 버티는 나무뿌리의 술병이 되게 했던 것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나도 한 방울의 술이 되어 녹는 날이 올 테니
그때는 굴참나무 쪼록쪼록 술 익는 소리에 취해 천년을 더 기다려도 좋을 터
뿌리에 매달려 떠오를 듯 들썩이던 길과 잡아당기다 만 저 산봉우리와
엉덩이를 들었다 놓은 바위들이 이제 나의 벗이다
손택수(1970~) ‘굴참나무 술병’ 전문
시인의 상상력이란 참으로 무한하다. 굴참나무를 끙끙거리며 따지 못했던 와인병의 코르크마개로 보다니. 일단 그렇게 보고나니 시는 점점 재미있어진다. 대지로 흘러든 것은 무엇이든 술맛을 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천둥, 번개, 햇발, 빗발…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순리이고, 자연으로 귀의하는 일이므로. 지구의 꼭지는 어디에 있는 갈참나무일까? 그 꼭지가 뽑힐 때를 상상해보는 재미가 제법 크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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