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듣는,
오랜 외출에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도마소리
지상에서 듣는 마지막 소리여도 좋을, 파릇파릇
도마를 건너가는 칼날의 탭
댄스
짧게, 짧게, 고르게 시간 속으로 물을 뿌리는
아내는 착한 정원사
아내와 내가 빗소리로 지은 집에서 빗소리의 주름으로 커튼을 치고
붉은 열목어가 되어 출렁이던 방, 문고리엔
뒤섞인 지문들
그 사람 소복이 파 썰어놓고 내게 와 나직한 숨소리를 듣다가
멀어져가는 발걸음소리
모로 누운 얼굴 감은 눈 속에 거실을 질러 저만치
늦은 오후 한때를 은행나무 햇순 같은 아내가 다녀가네
누가 내 잠속에 누룩을 박아 둔 걸까? 꿈의 초입부터 풀잎이
불어나 풀잎의 바다를 가물가물 떠가네, 빗소리를 거슬러
유실된 기억 하나씩을 줍는 기나긴 여행이네
아내는 빗살무늬 항아리로 물 긷던 사람, 빗살과 빗살 사이
뇌성이 울다가고 빙벽이 무너지고 들소가 울부짖네
햇빛에 눈이 찔려 사슴이 달아나네
조정인(1953~) ‘빗소리는 아내의 기척처럼’ 전문
절반은 빗소리에, 절반은 잠에 취해서 듣는 칼도마소리.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현실에 지극히 안도한다. ‘문고리에 뒤섞인 지문’으로 미루어 식구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비오는 날 아내와 단 둘만의 시간이 마냥 행복한 듯. 아니 단순히 행복하다는 말로 끝낼 수가 없기에 화자는 빗살무늬 항아리로 물을 긷던 신석기시대에까지 독자들을 이끌고 간다. 빗소리, 바람소리 들려오는 바깥에선 더러 천둥이 치기도 하고.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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