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그 더벅머리 이름을 모른다
밤이 깊으면 여우처럼 몰래
누나 방으로 숨어들던 산사내
봉창으로 다가와 노루발과 다래를 건네주며
씽긋 웃던 큰 발 만질라치면
어느새 뒷담을 타고 사라지던 사내
벙뎀이 감시초에서 총알이 날고
뒷산에 수색대의 관솔불이 일렁여도
검은 손은 어김없이 찾아와 칡뿌리를 내밀었다
기슭을 타고 온 놀란 짐승을 안고
끓는 밤 숨죽이던 누나가
보따리를 싸 산으로 도망간 건 그날밤
노린내 나는 피를 흘리며 사내는
대창에 찔려 뒷담에 걸려 있었다
지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대밭에 숨고
집이 불타도 누나는 오지 않았다
이웃 동네에 내려온 만삭의 처녀가
밤을 도와 싱싱한 사내애를 낳고 갔다는 소문이 퍼졌을 뿐
이시영(1949~) ‘지리산(智異山)’ 전문
지리산으로 들어간 사내와 하필 사랑에 빠져버린 누나. 한 시대의 비극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평범한 이웃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형제라는 관계 외에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람들. 조용하던 마을에 문득 찾아온 전쟁과 이념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지리산은 우리에게 있어 쉽게 지울 수 없는 상처다. 여기서 한참이나 되는 세월이 더 흘러간다 해도.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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