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에는 주로 한국 출장계획을 잡아 화랑의 크고 작은 일들도 보고 짧은 여행도 하며 숨 고르는 시간을 갖곤 하는데 몇해전 출장땐 우연히 동숭동 대학로를 걷다가 온갖 국적불명의 간판들 사이에서 아직도 촌스럽게 다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여전히 60-70년대 언저리를 서성이는 듯한 ‘1956, 학림다방’ 간판을 본 순간 마치 매연 가득한 서울하늘에서 별빛을 본 듯 어찌나 반갑던지 무작정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선 이후 이제는 한국에 갈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 되었다.
마치 프르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따뜻한 홍차에 적신 한조각의 마들렌 과자를 통해 잊혀진 시간의 문을 열고 기억 속으로 들어가듯 난 그 낡은 문은 통해 오래전 내가 두고 떠나왔던 그림속 구도안으로 다시 들어간 듯 아련한 느낌이었다.
내가 처음 이곳을 알게된 것은 대학을 다니며 내 공부를 돌봐주던 막내 외삼촌 때문이었는데, 집안 어른들이 삼촌을 찾을 때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난 시인 황지우가 그의 시에서 ‘스메타나, 몰다우강이 쏟아지는 학림다방 목계단’이라고 말한 그 유명한 낡고 가파른 계단 입구에서 삼촌을 불러내곤 하였다.
서울 문리대의 옛 축제명 학림제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학림다방은 서울대가 동숭동에 자리잡고 있던 시절인 1956년 문을 열었다 하는데, 그후 철학, 문학, 예술을 논하던 젊은이들을 위한 몇 안되는 그들만의 공간이 되어 문리대의 제25 강의실이라고 통하였다하며 4.19 학생 혁명, 5.16, 그 이후의 민주화 운동시절 전민학련 첫 모임을 그곳에서 갖는 등 대학생들의 토론 장소로 우리 역사의 고난을 함께 지켜봐온 곳이기도 하다.
하루종일 구석에 앉아 피아노 협주곡 ‘황제’만 계속 신청한 탓에 ‘황태자’라 불렸다는 시인 김정환, 볼레로를 청해 들으며 울었다는 ‘무진기행’의 소설가 김승옥, ‘오적’의 시인 김지하, ‘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 민중시인 황지우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천상병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은 지성들이 드나들었던 곳이었으나 고운 옛빛 그대로인 마로니에 광장 은행나무와 달리 사람들은 모두 옛 사람이 되었다,
괴테가 늘 다니던 베네체아의 카페 플로리안,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다니던 파리의 플로르, 쿤데라가 단골로 다닌 프라하의 카페 슬라비아 등등… 유럽의 나라들을 여행하다보면 늘 오랜 이야기를 간직한 카페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부침이 심한 대도시 서울의 낯선 건물들 사이에 고립된 섬처럼 안쓰럽게 떠있는 이곳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쓸쓸하게 이야기하는 듯하였다.
변한 세월 탓에 이제는 장식용이 된 턴테이블, 벽장 가득 빼곡히 꽂혀있는 LP레코드판 대신 CD로 틀어주는 음악 등… 옛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긴 하였지만 어린 시절, 우리들의 덜 여문 감성을 뒤흔들던 전혜린의 수필에 수없이 등장하는 곳도 이곳이니, 서울에 갈 기회가 되면 마로니에 광장이 내다보는 창가자리에 앉아 전혜린, 그녀는 어디쯤 앉아 담배연기를 날리며 예술과 인생을 이야기 했을지 속절없이 궁금해 하기도 하고, 20년이 조금 넘었다는 낡은 방명록에 남긴 그리운 이들의 메모도 읽으며 시간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학림시절은 내게 잃어버린 사랑과 실패한 혁명의 쓰라린 후유증, 그러나 로망스였다” -김지하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학림이란 이름은 안 잊었노라” -홍세화
(학림다방 방명록 중에서)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학림다방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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