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진, 도장밥 없이도 인감을 자알 찍으셨다
훅 부는 입김에 지난 날 인주찌꺼기가 살살 녹아
당신의 이름 석 자 요술처럼 그려지면
마치 실험에 성공한 연금술사처럼 흡족한
웃음을 지으셨다
열 마지기 정구지 밭을 팔 때도 그랬고
살던 집에 신작로가 날 때도 그랬다
도무지 붉은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뿔도장도
이 방 저 방 막 굴러다니던 새까만 나무도장도
후후,
아버지의 입김 앞에선 모두다 생피를 흘렸었다
어머니 시집오실 때도 그랬고 이복형제들이 호적에
오를 때도 그랬다
늘 굳게 닫힌 지갑이 어머니 쌈지에 있었다면
늘 뚜껑 달아난 도장이 아버지 주머니에 있었다
후후,
어떤 계약도 치르게 만들던 막걸리냄새 풍기던
당신의 입김, 정말이지 희대의 도장밥이었다
구광렬 ‘아버지의 입김’ 전문
아버지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도장에 대한 진술만 갖고도 한 집안의 재산관리 형태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도장밥 없는 인감이라도 후후 불기만 하면 못할 것이 없었던, 아버지의 입김은 과연 대단해보인다. 가부장적인 제도 아래서 고통 받았을 것을 가족이지만, 이 시는 그것을 참으로 맛깔나게 풀어내고 있다. 세월이 흘러서일까? 지금은 한 시대의 한량이었던 아버지들을 모두 용서, 아니 그들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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